둘은 남녀의 관계를 떠나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였다.
그날까지는.

언제나처럼 시작은 단순했다.
문제는 도를 넘어버린 알코올과 어둑한 조명이 문제였다.

“널 가지고 싶어.”
대원은 혼란스러워하는 지율의 허리를 부술 듯 안고는 탁하게 말했다.

“지율아, 정말 오늘 널 가지고 싶어. 싫다면 고개를 흔들어줘.”
그리고 지율은 그의 말과 반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널 가지고 싶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누구보다 다정한 연인이 되었다.
그녀가 돌아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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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사람과 사랑을 좋아하는 행복한 망상가.

출간작
내겐 너무 어린 아내
그들의 연애수칙
사랑에 길 잃다
파라다이스
은수, 한강 평정기
귀여운 큐피드
번갯불에 콩볶기 외 다수.

잠에서 깨어나니 어느 새 아침햇살이 어둠을 가르며 창을 밀고 들어와 있었다. 지율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자신의 침대에 있는 가슬가슬한 삼베로 말은 시트와 이불 그리고 베갯잇에 서늘한 기분을 만끽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떠올리려는데, 볼에 닿는 감촉이 전에 없이 따스하고 단단했다.

그 느낌이 좋아 지율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더 깊숙이 말려 들어갔다. 그러다가 눈을 번쩍 떴다.

이, 이런!

지율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휘둥그레졌다. 부스스한 몰골로 눈곱까지 낀 사내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떡 하니 있었던 것이다.
햇살을 받아 얼굴의 기름기가 반들반들 빛을 발했고, 턱에는 푸르스름한 수염이 돋아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외모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 아름다운 이목구비였다. 하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게 드르렁드르렁 꼭 뱃사람처럼 코를 골았다.

지율은 제 눈이 믿기지 않아 눈꺼풀만 끔뻑거렸다. 그러다가 언뜻 온몸으로 느껴지던 감촉을 떠올렸다. 지율은 겁먹은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전에 없이 창백하다 느낄 정도로 흰 피부에 전체적으로 부담스럽지 않은 근육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나신, 단단해 보이는 가슴, 거기다 날씬한 늑골 아래로 얇은 이불 속으로 사라지는 복근 아래가 보는 이로 하여금 민망하다고 얼굴을 붉히게 하는 무엇이 불쑥 솟아올라 있었다.

솟아 오른 기둥이 무엇인지는 모를 리가 없는 지율이다. 그랬다. 남자 형제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지율이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치며 살아왔는데, 새삼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지율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사정없이 긁다가 그대로 얼었다.

“아!”
자신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엄…… 마…… 야…….”
지율의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그래 이게 꿈이겠지? 설마, 이게 현실이겠어?”
지율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래, 너무 바라다 보니 그게 꿈으로……. 아브라카타브라 꿈이라면 깨라 얍!”
지율은 손가락을 꼬고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떴다.

“히익!”
여전히 눈곱을 붙인 채 잠이 든 대원이 눈에 들어왔다.

“아…… 미쳐.”
마지막 남은 눈 하나도 화들짝 뜨며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지율은 제 이마를 꽁꽁 먹이며 머리를 굴렸다. 왜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별의 별 생각을 다하다가 대원을 빤히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좀…… 깬다.”
지율은 혀를 차며 몸을 돌려 이리저리 고개를 휘휘 저으며 서둘러 각 티슈를 찾았다. 바로 옆 협탁 위에 있었다. 티슈를 뽑아 그의 눈곱을 살며시 떼어 내며 그녀는 부지런히 생각이라는 것을 정리했다.

제일 먼저 대원의 어깨를 뒤덮은 칠흑 같은 먹장구름 너머로 어슴푸레한 슬픔이 찾아드는 것이 한눈에 보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 대원이 실연을 당했지!
머리에 언뜻 떠올린 기억으로 지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 실연당했어, 대원이가.”
실룩실룩 입술이 슬그머니 비틀리다가 삽시간에 위로 올라갔다.

“푸하하하 합!”
대원이 깰까 지율은 제 웃음에 지레 놀라 손으로 벌어진 입을 막았다. 마누라가 죽으면 뒷간에서 킬킬거리는 족속이 있다더니, 그 비슷한 상황임에 틀림없었다. 지율은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키득거렸다.

앗싸아! 나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오는 것인가!
지율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주 민망한 상태로 주먹을 불끈 쥐어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오랫동안 한 사람을 지켜보는 것이 그리 흥미로운 일만은 아니었다. 평소 낙천적인 지율로서도 몹시도 고통스러운, 완성도가 높은 거대한 감정의 파도에 의해 산산조각 나기가 수천, 아니, 수억 번이었다.
어쨌든 지율은 실연한 그를 안아주며 함께 슬픔을 삭였다. 아니, 동변상련의 아픔을 느끼는 척했다. 쾌재를 부르고 싶은 엉큼한 속내는 애써 누르고 말이다. 조각 하나를 머릿속에서 꺼내어 이어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