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곤히 자서 먼저 간다. 즐거웠다 -
떨리던 첫사랑과의 하룻밤 추억은
악필로 쓴 쪽지와 함께 쓰디쓴 악몽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7년 후에 열린 반갑지 않은 재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네. 반갑다.”

더 이상 엮이길 원하지 않는 그녀와
다시는 그녀를 놓지 않기를 원하는 그.
“네 인생 최악의 경험은 뭔데?”
“너. 할 수 있다면 두 번 다시 기억나지 않게 꽁꽁 싸매두고 싶어.”

사랑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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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수

다 같이 시궁창에 누워도
누군가는 별을 본다고 하죠.
별이 참 아름답습니다.
총총총.

출간작
초야의 남자
구제불능 로맨스

가화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미 원진은 떠난 뒤였다.
싸늘하게 식은 침대는 원진이 방금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빈 몸을 침대 시트로 감고 두리번거리며 원진의 이름을 부르던 가화의 눈에 협탁 위에 놓인 메모지가 보였다.

- 곤히 자서 먼저 간다. 즐거웠다. -원진

생긴 것 답지 않게 악필인 원진의 흔적을 보고 가화는 머리가 멍해졌다. 메모지 뒷장까지 다 둘러봤지만 정말 이게 다였다. 그 흔한 연락처 하나 남기지 않았다. 원진의 메모가 무슨 암호라도 되는 양 뚫어지게 보던 가화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즐거웠다’라는 말을 남긴 의도조차 알 수 없었다.

가화는 원진의 연락처를 모르고 있었다. 알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알 수는 있었지만, 그가 가르쳐 주지 않는 전화번호 따위 의미가 없었다.
가화는 다 구겨진 메모지를 다시 한 번 펴서 읽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원진의 악필이 남은 종이가 순식간에 눈물에 푹 젖어들었다.
망상은 망상을 낳아서, 가화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처음 몸을 내주고 버림받은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원진이 침대에서 ‘날 좋아해?’라고 물었던 건, 혹시나 제가 끈적거리며 달라붙을까 봐 선수를 친 걸지도 몰랐다.

가화가 만약 좋아한다고 했다면, 원진은 그때 확실히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말라고. 우리는 그냥 하룻밤 즐기는 사이일 뿐이라고.’
난생처음 반해버린 상대에게 엉덩이 가벼운 여자가 돼버린 가화의 심장은 산산조각이 난 것 같았다. 이 심장이 다시 뛸 수 있을까 싶었다. 결국 자리에 엎드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던 가화는 제 가방을 찾았다.

마지막 양심이라도 있는 건지 원진은 테이블 위에 가화의 옷가지와 가방을 단정히 올려놓았다. 그녀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제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감미로운 음악소리가 한참 들리더니 잠에서 덜 깬 흔적이 역력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운겸아…….”
가화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목 놓아 울었다.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운겸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왜 울어? 무슨 일이야?]

“오면 얘기할 테니까 나 좀 데리러 와. 문자로 남길게.”

[당장 갈게. 기다려.]
운겸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휴대전화와 차키, 지갑만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차에 시동을 건 운겸은 가화가 남긴 문자를 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유가화와 호텔이라니,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조합이었다. 엑셀을 거칠게 밟은 운겸은 꽉 막힌 아침 출근길을 헤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문 열어!”
밖에서 들리는 운겸의 화난 목소리에 가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룸에 들어온 운겸은 가화를 한 팔로 안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룸 안을 둘러봤다. 간밤의 흔적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엉망으로 구겨진 침대 시트를 보고 그는 다시 한 번 이를 악물었다.
운겸은 아직까지 서럽게 울고 있는 가화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떤 새끼야? 설마…….”
주먹을 꽉 쥔 운겸은 엉망으로 젖은 가화의 얼굴을 보고 최악의 생각이 떠올라 황급히 그녀의 팔과 다리를 확인했다. 폭행의 흔적은 없어보였다. 하얗게 질린 운겸의 얼굴을 보고 가화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유혹했어.”
그 와중에도 운겸에게 원진을 아주 나쁜 놈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가화는 애써 그를 변호했다.

“유혹?”
운겸은 두 눈을 갸름하게 뜨고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가화를 바라봤다. 차갑고 도도한 가화의 겉모습은 그저 낯을 많이 가리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지, 실상은 맹한 구석도 많고, 하나에 꽂히면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않는 외골수라는 것을 운겸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 동네 미친놈한테 스토킹을 당한 경험 때문에 남자한테 겁이 많은 가화는 충동적으로 남자에게 손을 먼저 내밀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 가화의 입에서 유혹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면 뻔하고 뻔했다.

“최원진?”
가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겸도 원진이라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난 3년 내내 가화는 원진의 이름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가화의 이야기만 대충 들어도 운겸은 원진이 저와 같은 부류의 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운겸은 가화가 외모 멀끔하고, 주위에 여자가 바글바글해서 저 잘난 맛에 사는 남자보다는 한 여자만 바라보는 성실한 남자를 만났으면 하고 바랐다. 최원진 같은 놈은 딱 여자 마음 고생시킬 놈이었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운겸의 뒷골이 띵하고 당겼다.

“너 설마?”

“뭐?”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빨간 코끝을 훌쩍이는 가화를 보고 운겸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너, 내가 하라는 대로 했어?”

“응.”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화를 보고 운겸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지난 주말, 가화는 원진이 학교를 휴학하고 군대를 간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굴었었다. 그 모습을 본 운겸은 고백은커녕 말 한 번 제대로 걸어보지 못한 가화가 불쌍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툭 던졌었다.

‘그렇게 좋으면 확 덮치든가. 너처럼 예쁜 여자가 덤비는데 마다할 남자 없다.’
운겸의 말에 가화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덮쳐?’라고 되물으며 운겸을 바라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