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모든 기억을 잃은 명한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이규현.
그런데 그에겐 분명 자신에 대한 기억이 존재한다.
이규현이 아닌 다른 남자의 기억이.
그는, 이규현이 아니었다.

화재 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윤이경.
그런 그녀의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
처음엔 단골손님으로, 그다음엔 직장 동료로, 이제 이웃사촌으로.
그녀가 힘들거나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면 그녀 옆엔 늘 이규현, 그가 있다.
묘하게 전남편을 떠올리게 하는 그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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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는 누구일까?
나는 이규현인 걸까, 아니면 한강석인 걸까.
이제 그 자신조차 헷갈리기 시작한다.

다시 그녀의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힘들어하는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그를 절망에 빠뜨린다.

한강석이다! 한강석이 분명하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는데,
자꾸만 그에게서 그 사람이 보인다.
이제 그녀조차 헷갈리기 시작한다.
규현이 강석을 닮아서 좋아하는 건지, 그냥 규현이 좋은 것인지.
그런데 또다시 그가 떠나려 하고 있다. 전남편과 같은 화재 사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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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자(허시사랑)
loveis-357@hanmail.net

용띠. 정월생.
소심한 A형. 심각한 귀차니스트.
로맨스에 중독된 해피엔딩 마니아.
작가 연합 ‘깨으른여자들’에 상주 중.

▶ 출간작
<미워할 수 없는 남자>
<그대와 영원히>
<슬픈 인연>
<사랑은 아프다>
<그대에게 가는 길>
<당신이 필요해>
<밀회>
<어린 연인>
<마린 걸> 외 다수.

“살아 있다는 거, 좋은 거죠?”
느닷없는 규현의 질문에 이경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거,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거, 그거 다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잖아요. 그렇죠?”
규현을 향해 고개를 돌린 이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요, 라는 말을 해 주기 위해. 그런데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말 대신 어이없게도 울컥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자꾸만 잊어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고 생각했던 걸, 자꾸만 잊어버려요. 그리고 원망하죠. 미워하기도 하고. 후후후!”
가까스로 울음을 삼킨 이경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람이니까요. 사람이니까 그런 거예요.”
촉촉하게 젖어 있는 규현의 눈을 바라보는 이경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도 잊지 마세요.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세요. 살아 있다는 건, 그건, 정말로, 정말로 좋은 거거든요.”
덤덤하게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음도 살짝 베어 물고서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울음은 이경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 눈에 담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 있다는 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기쁨이고, 행복이니까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는 이경의 눈에 그리움이 가득했다.

“살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잖아요. 그래서 살아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자신을 바라보는 규현의 강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경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이경은 아픈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규현은 그런 이경을 슬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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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경! 아무 생각 말고 그냥 살아. 좋으면 좋은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그렇게 살아. 날 밀어내려고 하지 말고 애쓰지도 마. 그냥 지금 윤이경의 삶을 즐기면서 살아. 필요하면 날 이용하기도 해. 쓸데없이 복잡한 생각하지 말고 주어진 삶을 즐겨. 부탁이야.”
이경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나 말이야, 절대 절대 윤이경의 삶에서 빠질 생각이 없어. 그렇다고 뭘 원하는 건 아니야. 물론 윤이경이 나랑 같은 시선, 같은 마음이라면 더 바랄 게 없겠지.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좋아. 충분해.”
진심이었다. 이렇게 이경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이경의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규현은 충분했다.

“내가 행운이라고 했지? 앞으로도 쭉 난 윤이경의 행운이 될 거야. 그러니까 날 밀어내지 마. 날 밀어내면 불행이 찾아올걸?”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이경은 웃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내린 채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경아!”
이경을 부르는 규현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기대 줘. 의지해 줘. 그거면 돼. 그거면 충분해.”
내내 시선을 내린 채 앉아 있던 이경이 눈을 들어 규현을 담았다.

“나는, 나는요.”
이상하게 규현은 이경이 입을 열면 그 입을 막고 싶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고 싶다. 두려웠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겁이 나요. 자꾸 당신한테 가는 내 마음 때문에 난, 난 정말 겁이 나요.”

“이경아…….”

“미안해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 다예요.”
눈빛도 차가웠다.

“난 당신 의지하지도 않을 거고, 기대지도 않을 거예요. 이제부터는 내게 다가오려는 당신한테 모질게 대할 거고 상처도 줄 거예요. 그러니까 더 이상 다가오지 말아요.”
말을 잇기가 힘든 듯 마른침을 삼킨 이경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규현 씨 좋아했던 거…….”
규현이 피식 웃으며 이경의 말을 잘랐다.

“아니, 지금도 넌 날 좋아해.”
정곡을 찔린 듯 이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요. 난 지금도 규현 씨를 좋아해요. 그래서 더 아프고 힘들어요.”
이경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말했죠? 남편이 죽는 날 약속했다고. 그 약속 지키고 싶어요. 날 정말 좋아하면, 날 정말 아낀다면 부탁해요. 날 그냥 내버려 둬요. 흔들지 말아 줘요.”
규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러지 않을 거야. 난 네 옆에 있어야만 숨이 쉬어지거든.”
진심이었다. 규현의 진심이 이경의 눈에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