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한테 저는 뭐였어요?”

스물한 살의 그녀는 보통의 또래와 달리 전혀 꾸미지 않고
수수하기만 한데도 빛이 난다 싶을 만큼 단정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언제 목이 꺾여 꽃 머리가 떨어질지 몰라 불안한 작약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채 위태한 아름다움 같은 걸 저도 모르게 초연하니 흘리고는 했다.
그렇게 그녀는 부서질 듯 웃고, 사그라질 것처럼 걸었다.

“사랑만 빼고 다 드렸어요. 아직 저한테 얻을 게 남아 있나요?”


“잊지 마. 네가 어딜 가든…… 나는 따라갈 거다.
만약 네가…… 죽고 싶어지거든 그래도 좋아. 나도 따라가면 그뿐이니까.
네가 곧 나라는 걸 잊지 마라, 사해야.”

그의 속삭임은 꿈결 같았다.
아무리 두 눈을 깜빡여 봐도 저를 마주보는 것은 분명 그였고
제 뺨을 쥔 것도 진짜 그였다.
슬플 때만 눈물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너무 감당하기 힘든 사랑고백을 받았을 때도 눈물이 난다.
너와 함께 죽겠다 할 만큼 사랑한다고, 그가 말할 때.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만큼, 사랑해. 사해야.”

김애정(애원)/
작가연합 ‘아모르 빈시트 옴니아’ 소속.
(http://cafe.naver.com/amorvincitomnia)

출간작
s프랜드
신혼만 원하는 여자
어게인

출간예정작
묘(猫)한 이야기
미스테이크

자해하듯 사해는 그의 욕망 찌꺼기를 받아왔다. 해소하는 용도의 도구로. 비참함에 머릿속이 문드러져 아무렇지 않아지도록 그렇게 계속. 느끼지 않아 버리는 게 버릇이 되도록 계속. 무려 2년을, 그건 그와 반짝 사랑 비슷한 것을 나눈 시간의 세 배쯤 됐다.
그는 정말 키스하지 않았고 사해 역시 시체처럼 입술을 물고 그의 밑에 깔리길 반복했다. 애정 없는 손길을 받아 내는 건 스스로를 벌주는 것과 같았다. 그의 진심을 무참히 짓밟은 벌, 그의 고백을 내친…… 고해. 마음 대신 몸만 내주고 마음 대신 몸만 받는 텅 빈 거래.

그 역시 별다른 애무 없이 그저…… 분출했을 뿐이었다. 몸을 팔고 사는 것 같은 마음 없는 섹스를 이었다. 사해는 그러는 동안 자신에게 질리지도 않는 그가 이상했고…… 동시에 미안했다. 다른 여자를 안을 수 있다고 했으면서. 그에게서 다른 여자의 향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훨씬 매력적인 여자들이 많은데, 그라면 그중 얼마든지 잡을 수 있을 텐데. 쉽게 내주는 몸, 저라면 줘도 싫을 것 같은데 인우는 인상을 험하게 구기더라도 사해를 잡고, 잡고 또 잡았다. 네가 밉다 싫다 말하면서도 계속 품에 안고 제 몸을 묻었다.

“왜 계속 와요. 왜 왜…….”

“…… 미워지지가 않으니까! 다른 여자는 안 되니까! 나도 화나니까 입 닥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건 인우로서도 화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게 자신을 괴롭히는 그의 수단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해는…… 그 관계가 1년쯤 이어졌을 때 그를 보듬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다시 그를 만지려 하고 조금씩 살갑게 쓰다듬으려 노력했다.
제 손을 문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아픈 건 제 쪽이면서 말이다. 인우는 그에 위선자 같이 굴지 말라고, 착한 척 넌더리가 난다고 악을 쓰며 다시 내미는 사해의 살가운 손길을 경멸하듯 쳐냈다.
그래도 사해가 어쩔 수 없이 안타까워 뻗고, 뻗고 뻗으니…… 잠자코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까 말까 고민하는 짐승처럼 불안하니 사해의 손길을 받고는 했다. 선뜻 허락했다가는 또 거절당할까 그러는 게 보였다. 전처럼 온전하게 되돌릴 수는 없었다. 너무 멀리 돌아와 버렸으니까.
그저 만져 주는 것, 만지게 해주는 것만이 이 둘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찍이 부비고 살아 본 적 없는 외톨이 짐승들이 새삼 무리를 짓는 건 쉽지가 않았다. 혼자 굴을 파고 고독을 씹고 배를 곯는 게 익숙한 척박한 땅의 짐승이 한 집에 둘이나 있었다.

그것도 서로 할퀴는 것도 애정 표현이라 여기는 불쌍한.

“근사해…… 네 인생 참 불쌍해. 너처럼 이름값 못하는 사람도 드물 거다.”

“……그런가요?”

“그래! ……바보같이.”
혹시라도 대화할 때면 하나는 항상 으르렁댔고 하나는 그저 웃고는 했다.

“우리 둘 다…… 참 바보네요.”
종종 키스를 하기도 했다. 인우가 잔뜩 취해 제정신이 아닐 때나. 사해가 잠든 그에게 몰래 도둑질하듯 스쳐 하거나.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항상 최선이라고 여기고 행동하는데 그게 힘겨우니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사해가 스물네 살 되던 해, 암 투병 끝에 사해의 어머니가 결국 명을 달리했다. 지독한 시간 끝에 끝이 났다. 그리고 곧 죽어 버릴 친부가 바통을 잇듯 나타나, 그렇게 또 가버렸다. 사해에게 절절히 혼자임을 각인시키고 떠나는 부모들이라니. 쓴웃음이 나버리는 인생이다.

사해의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함의 연속이었다. 고약하고 지긋지긋하고…… 구역질이 나는 아주 서글픈,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은 딱 그런 삶. 하지만 겪은 사람이 있는 전혀 근사하지 않은…… 근사해의 삶.

스물네 살, 사해는 마침내 저택을 떠났다. 자의는 아니었다. 한국을 떠난 것도 역시 자의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