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부터 신분증 검사가 필요 없던 조숙한 외모에,
허구한 날 지각에 성적은 끝에서만 맴돌던 그녀가
10년의 순정을 끝내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

“전 그날까지 선생님을 다신 찾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약속 잊으시면 안 돼요.”

“무슨 약속?”

“제가 학생이 아니라 선생이 되면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

“기대하세요. 선생님”

“……뭘?”
그녀를 올려다보는 규진의 표정은 여전히 멍했다.

“I’ll be back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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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희

자신의 가족,
그리고 출판사 담당을 사랑하는 여자.

하늘에는 온갖 종류의 구름이 떠 있고, 그 구름 사이로 달만 간신히 고개를 내미는 짙은 바다 같은 어둠이 치맛자락처럼 내린 밤.

검은 기암절벽을 닮은 건물에 어둠을 희롱하며 점점이 빛나던 인공의 별빛이 하나둘 깜빡 졸듯 사라지기도 하고, 화들짝 깨어나기도 했다. 차가운 바람이 짐승처럼 한차례 울고 지나갔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어깨를 오소소 떨면서도 활개 치듯 크게 원을 그리며 치켜든 두 팔이 가까워지자 다소곳이 모아진 두 손에 달빛이 내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된서리보다 더 차가운 입김을 뿜어내는 입술 사이로 주문처럼 나직한 음성이 리드미컬하게 새어나왔다. 정수리 위에서 모아진 두 손을 끌어내려 가슴에 고이 붙이며 허리를 숙이는데…….

딱!
하늘에 떠있어야 하는 별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앗! 뭐야아!”
고개를 획 치켜든 수련이 도끼눈을 떴다.

“뭐, 천지신명께 빌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선영이 잔뜩 이죽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매지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선영은 엄연히 법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수련의 어머니였다.

“이 신성한 의식을 왜 망치는데에!”
그렇게 투덜거리는 수련은 그녀의 생물학적인 나이보다 5년 이상 나이가 들어보였다.

“뭐 신성한? 신성한이 다 얼어 죽을 소릴 하고 자빠졌네. 천지신명께 백날 빌어봐라.”
반면, 잔뜩 비아냥거리는 선영은 그녀의 생물학적인 나이보다 20년은 더 젊어 보였다.

“엄마!”

“뭐?”

“엄마, 계모지?”
사실 수련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 노려보는 두 사람은 지나치게 닮았다. 꼭 친자매처럼.

“웬 계모 타령?”

“계모 아니라면 이럴 수 없어. 왜 내 기도를 망치는데에. 창창한 딸 앞길에 소금을 뿌려도 유분수지.”

“아예 소금 뿌려줘?”

“엄마아! 아예 악담을 해, 악담을.”

“얼른 안 들어가?”
선영이 주먹 쥔 손을 수련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안 들어가, 못 들어가. 빌어야 한단 말이야. 정성들여 빌기 전까지 안 들어갈 거야!”
그래서 목욕재개도 하고 아무렇게나 뻗치던 머리도 얌전히 말려 야무지게 묶었다.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나에게 빌어라, 나에게. 하느님보다 그게 더 현실적이다.”
선영이 가슴을 치고 자신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경찰 오토바이를 모는 순사 나으리에게 빌든지. 하늘에 빌면 하느님이 널 깨워주기라도 한다는 거야? 아니면 뻑 하면 지각하는 널 오토바이에다 태워 고사장까지 태워주기라도 한다는 거야.”

“내가 비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그럼 뭔데?”

“그건…….”
선영에게 말할 순 없었다. 입 밖으로 내었다가는 아마도 정신병자용 벨트재킷을 입고 사방이 하얀 독방에 감금될지도 몰랐다.

“엄마가 말하면 뭐 알어?”
수련이 샐쭉해져 말했다.

“알든 모르든 말해봐.”
선영은 거의 체념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아, 몰라. 아무튼…….”

“아무튼 너 사수하기만 해?”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수련의 말꼬리를 확 낚아챈 선영이 눈을 부라렸다.

“하면 뭐?”

“호적 확 파버린다.”
선영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선언했지만 수련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선영이 잔뜩 벼렸다.

“내가 언제 웃었다고 이래?”
간신히 웃음을 삼켰다. 언제나 같은 레퍼토리였으니 식상하기까지 했다. 재수하면 파버린다고 했던 호적이 재수를 해도, 삼수를 해도 여전히 그대로였던 것이다.

“왜 굳이 거기야?”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선영은 수련에게 몇 번이나 내신과 능력에 맞는 대학을 지원하라고 했다. 하지만 수련은 그 학교, 그 학과 아니면 안 된다고 몇 년째 요지부동이었다. 사실 학과는 상관없었다. 바로 그 학교를 가야만 했다.

“왜 꼭 거길 가야 하는 건데?”
그래야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갈 것이라 믿었다. 그 학교를 진학해야만 몇 년 후에 그곳으로 교생실습을 나갈 수가 있고, 운이 따라준다면 그곳으로 임용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에게 갈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 가는 것, 그것이 수련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에게 기다리라 했고, 수련은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끔 교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것을 확인하곤 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가 기다리라고 했으니 그 학교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수련은 그런 생각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에게 가려면 꼭 그 학교여야만 했다. 사수를 하는 한이 있어도, 선영이 벼르다 벼르다 진짜 그녀를 호적에서 파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녀가 지원할 마음을 먹은 체육교육학과는 개중에 만만했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만만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른 학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 삼수째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몰라. 내 기도 방해하지 말고 들어가.”

“너야말로 들어가.”선영이 수련의 팔을 우악스럽게 끌었다.

“엄마아.”

“안 들어가?”
버티는 수련을 질질 끌었다. 이럴 때 보면 외모와 달리 선영은 항우장사 버금갔다. 모전여전이라고 수련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갓 성인이 된 아가씨가 아줌마의 강짜를 당할 재간이 없었다.

“빨랑 들어가, 안 자? 내일 또 늦잠 자기만 해!”

“들어가, 들어간다고.”
결국 수련은 툴툴거리며 집 안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 아니 달님께 비나이다.
꼭 그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수능점수를 저에게 점지해 주소서. 욕심은 없나이다. 일점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고 딱 커트라인의 그 점수를 저에게 점지해 주소서.
휘엉청 떠오른 달을 한 번 더 힐끔 올려다보고 속사포처럼 속으로 되뇌며 말이다. 그 주문은 수련이 침대 속으로 들어가서도, 그녀가 잠을 자면서까지 잠꼬대로도 중얼거렸다. 그만큼 수련에게 그 대학의 입학은 절실했다.

그에게 돌아가려면 꼭 간다, 가고야 만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사이 마침내 동창으로 해가 솟아올랐다.
그녀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받을 어느 추운 수능일 아침의 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