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담은 에메랄드, 하늘을 담은 스카이 블루.
신비한 매력의 오드 아이를 가진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깨달아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빠지고 말았음을.

‘마녀야. 눈빛으로 사람을 홀리는.’

그리고 그 눈빛 뒤에 숨어 있는 그녀의 본모습을 알게 된 순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제 난, 저 아이 없음 안 될 것 같아.’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묘하게 닮은 두 사람.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운명 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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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 에로틱한 망상을 그리는 여자. 출간작 하얀 나비 비와 롤러코스터 숨바꼭질 태양의 신부 래그타임 까칠한 연인 사로잡힌 불꽃 외 다수

저 멀리서 가희가 보였다. 다다다, 뛰어가는 학생들 무리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산들바람과 햇살을 즐기며 산책을 하듯 걷고 있었다. 대후는 가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어 내려갔다. 그때, 웬 녀석이 내리막길을 달려 그를 스쳐 지나갔다. 어떤 예감이 들어 대후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의 예감대로 놈이 고의로 가희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가속도가 붙어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순식간에 휘청하며 가희가 앞으로 꼬꾸라질 찰나였다. 대후는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그녀의 허리가 심하게 야위었다, 라고 생각했던 것은 한참 지난 뒤였다. 그 당시에는 그녀가 고개를 비스듬히 올렸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 이성이 휘발되었다. 긴 속눈썹이 깜빡깜빡하며 에메랄드, 스카이 블루의 특별한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자 그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가희와 눈이 마주했던 그 짧은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궁극적으로는 그녀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등등 멍한 머리로 오만 가지 물음이 지나갔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었는데, 대후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하더니 느닷없이 활화산 속으로 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사람과 사물이 사라지고 온통 그녀의 눈빛 하나만 남아 그의 심장에 와서 콕 박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뭔가가 따스한 그의 볼을 스쳤는데, 그게 가희의 손길인지 눈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잔머리가 이마에서 살랑살랑 흔들리자, 그것이 따스한 봄바람임을 대후는 멍하니 깨닫고야 만 것이다. 그런데도 가희의 눈을 보고 있으니 마치 그녀의 따스하고 보드라운 손길로 만져지는 것 같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녀야. 눈빛으로 사람을 홀리는.’ 사람을 홀리는 눈빛을 피해 달아나니 더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붉고 촉촉하게 윤기 흐르는 입술이 그를 유혹했다. 고작 열일곱, 그러나 그 입술은 스물일곱 그 이상의 농염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적어도 대후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그러했다. 요염한 그 입술을 바라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또한 야릇하게 순수해 보여 대후는 이 여자아이에 비해 자신이 지나치게 시시껄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남학생들이 가희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런 점을 유추하긴 했지만, 몸소 체득하는 것은 그 충격이 남달랐다. 대후는 줄행랑을 놓기로 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홀려 버려 그녀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이 뻔했는데, 그것은 이날 입때껏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라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자에 대한 환상이 그에게는 없었다. 겉으로 아무리 순결해 보여도 그 속까지는 순결하지 않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여전히 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의지를 총동원하여 필사적으로 가희를 바로 세우고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현실이 들이닥쳤다. 그녀의 허리를 잡았던 손바닥이 화인이 박혀 버린 것같이 뜨겁게 느껴졌다. 대후는 손바닥을 쫙 폈다가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 손으로 무슨 짓을 했을지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현실로 돌아온 대후는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었던 것이 단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군가의 앞에 서서, 이렇듯 두 사람이 구성하고 있는 공간이 멈추고 시간이 멈추고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 처음인지라 두렵고 생소했다. 대후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면서 달리지 않으려고, 겁쟁이처럼 달려 달아나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고마워.” 그의 등 뒤에서 봄바람보다 더 산들거리는 나직한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날아왔을 때, 심지어 대후는 두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고맙다는 말이 뭐 그리 대수라고 마치 밀어를 속삭이는 것처럼 혈관을 타고 흐르며 그의 가슴을 선득선득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