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왕의 어린 정부.
그것이 엘레노아 드 제르트의 가장 유명한 직함이었다.
온갖 불명예를 뒤집어썼어도 친정에 충실한 엘레노아 드 제르트는
온갖 부귀영화를 부모와 오라비에게 가져다 바치었고,
그렇게 에트일은 권력의 정점에서 순조롭게 항해를 해 가는 듯했다.

—엘레노아 드 제르트가 독배를 마시기 전까지.

내게, 왕의 정부인 엘레노아 드 제르트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었다.
나는 그를, 이안 드 제르트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당신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독배를 들이켰다.
그 대가로,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을 과거로 흘려보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게 남은 것은,
메트레상티트르라는 오명과
왕의 가시 없는 장미라는 허울뿐.

“그래서 친동기를 상대로 연정을 품은 게 당연하다는 게냐?”
“참으로 가증스럽도다, 패륜의 꽃이여.”

그럼에도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왕의 가시 없는 장미가 아닌 당신의 검은 장미가 되고 싶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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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아

어린 시절, 스승님께 울면서 배웠던 글쓰기가 천직이 될 줄 몰랐다. 앞으로도 넘치는 창작열을 글로 해소할 생각인 꿈 많은 글쟁이.

개인 블로그: blog.naver.com/caimeviolett

<출간작>
춘우

<출간예정작>
날개일족 이야기, 집착의 덫, 붉은 달의 현혹

“로젠.”

이어 입술이 비틀리고, 그리 나를 담는 음성이 달콤했다. 어느 순간 단단히 결박되어 있던 내 손이 풀리었다. 애틋한 손등이 뺨을 쓰다듬는데, 애정이 듬뿍 담긴 것에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가만히 나를 향해 배시시 웃는데 그가 어린아이의 것처럼 천진난만했다. 어찌 이리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릴 때에 묵직한 것이 가슴 위로 올라왔다. 옷자락을 더듬고 그 안을 파고들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 속에 무엇을 원하는지는 눈에 빤히 보였다. 이미 살을 섞고 살아왔었으니,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이 기억하는 그것이 너무 익숙했다. 나는 그 손목을 매섭게 움켜쥐었다.

“하지 마요.”

“……하지 마?”

날이 선 내뱉음에 비틀린 웃음이 내게로 가득 쏟아져 내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이안의 모든 것이 비웃음으로 번들거렸다. 그답지 않게 차갑게 비틀린 입술에서 새파란 칼날이 쏟아졌다.

“왜, 왕이랑은 싫어도 하잖아.”
차가운 비로 쏟아지는 칼날은 정확하게 심장을 관통했다. 내가 쌓아 온 긍지와 자존심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나를 지금 아무나 타는 마차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는가? 나를 사랑한다고 지껄인 그가 어찌 저렇게 내뱉을 수가 있는가?

“그걸 지켜보는 나는? 어떨 거 같아?”
내가 새파랗게 굳어 버렸을 때에 순순히 물러선 이안이 속사포인 양 중얼거렸다.

“……난 말이야, 왕의 목을 쳐 버리고 싶어.”
그는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함부로 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시시 웃어 보인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그런 이안에게 진정으로 소름이 돋았다. 온몸에 오돌토돌하게 일어나는 것들은 스산하게 마음을 적시는 공포와도 같았다. 나는 애써 입술을 물었다.

“그러면, 치세요.”

“왕의 목을 치고, 함께 도망갈까?”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내 손끝에서 노니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이 부드러운 결. 그의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만큼 그의 신분은 높았다. 이 사소한 것이 내 손에서 간지럽게 노니는 만큼 그는 고귀한 이의 아들이다. 나는 조금 더 본질적인 것을 건드렸다.

“그런데 이안 드 에트일이 도주자의 삶을 견딜 수 있어요? 하층민과 같이 흙탕물 위에
서 뒹굴 수 있냐고요.”

“못 해. 그런데 지켜보고만 있는 것도 싫어.”
솔직하게 대꾸한 그가 내 입술 위에 조인을 찍었다. 혀를 세워 날름날름 핥아 갔다.

“네가 왕도로 다시 돌아가는 걸 지켜볼 바에야 진흙탕에서 뒹구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잔잔하게 내뱉는 그 한 마디에 숨이 막힐 뻔했다. 진흙탕에서 뒹구는 것이 낫다. 내가 왕도로 돌아가는 것보다. 그 말인즉 에트일과 신분이 주는 모든 권세를 포기하는 것보다 내가 왕 옆에 있는 것이 더 싫다. 내게 사랑을 읊조리는 그가 나를 향해 강렬히 태우는 것은 집착이었다. 달콤해야만 할 손이 내 얼굴을 매만지는데, 내 머리 위로 한들한들 피어오르는 것은 그저 공포였다. 따스한 손에서 오롯하게 느끼는 것은 그것 하나였다.

“……로젠, 우리 오랜만이잖아. 안 그래?”
신성한 아버지의 가르침은 나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머잖아 그러한 죄책감은 쾌감에 취해 자연스레 사라져 버렸다. 이안은 나를 탐하면서 성행위의 모든 것을 가르쳤다. 그와 정사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감각은 예민해졌다. 나는 그가 가르친 대로 반응하고, 그가 가르친 대로 다른 자세에 익숙해졌고, 그가 가르친 대로 쾌락을 따라 온몸을 내맡겼다.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맞추어 신음을 흘리는 나는 더 이상 어리고 천진난만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런 이안은 내 몸뚱아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 게 틀림없었다. 이것에 관해서는 모두 이안에게 배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오랜만이라고 말하면서 내 몸을 타고 미끄러지는 그의 손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저 손이 매만지는 곳에서 피어오를 열락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나였으므로.

깊디깊은 유혹 속에 연하게 흐르는 신음은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처럼 격렬하게 토해졌다. 하멜른의 사나이가 피리를 불었다. 매혹에 이끌리고, 미혹에 빠져들어 나는 부끄럼도 잊고 그에게 매달려 쾌감을 토했다. 내가 헐떡이며 매달리면 그가 미소를 덧그렸다. 마침내 그는 내 안에 가장 깊은 곳에 머물더니 순식간에 빠져나가, 그 밖에서 폭발했다. 색욕과 취기로 흐려진 눈빛이 나를 향했다. 쇄골과 가슴 위에 입술을 맞댄 그가 내 위로 엎어졌다.

쾌감으로 가득 찬 숨을 몰아쉬며 눈을 굴렸다. 이어 어둠에 익숙한 내 눈에 담긴 것은 양의 창자로 만든 피임 기구였다. 아득한 안개로 둘러싸인 머나먼 기억 속에서도 이안 드 에트일은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왕도 씨 없는 수박인데다가 남편이라는 세뷔네 마퀴까지 먼 곳에 있는 마당에 내가 아이라도 가지면 사달이 날 터였고, 스스로도 아이를 원하지는 않건만, 의미 없는 관계란 언제나 슬플 따름이다.

내 몸뚱아리에 대해서라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였으니 쾌락적인 면에서는 이보다 더 만족할 수가 없었건만, 감정적으로는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어딘가 한곳이 텅 빈 것 같았다. 이보다 더 한 허탈함은 여태껏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내 위에 엎어진 사람은, 나를 찍어 누르는 것은, 나를 단단히 누르는 이 무게감을 지닌 이는 여전히 이안 드 에트일이었다. 에트일 뒤크가(家)의 사내. 제르트가의 남자. 그리고 그의 무게감에 취해 방금 전까지 쾌락을 토한 나는 에트일 뒤크가의 딸이었고, 제르트가의 여자였다. 순간 토악질이 오를 뻔했다. 깊은 곳 저편에서 파고드는 것은 오래된 죄책감이었다.

신성한 아버지의 가르침이 뒤늦게 머리를 떠올랐다. 그 어린 시절, 그와 처음으로 관계했을 때에 느낀 죄책감은 체위 때문이었다. 헌데 지금 느끼는 건 조금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이미 살을 섞고 살아온 지 오래되었을 것이었는데, 죄책감은 그 시간 속에 무뎌지고 무뎌져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야 옳건만 나는 새삼 이런 것을 느끼는가? 내가 과거에 얼마나 도덕적이었다고 이러는가?

“……물론 난 널 사랑해. 그래서 내게 있어 다른 사람들보다는 네가 우선이지. 하지만 아무리 너라고 해도 에트일의 앞길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어.”

……뼈를 아우르는 시린 한마디가 부서뜨린 건 내 마음도, 이안의 속내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 눈앞에서 깨어진 얼음처럼 산산조각 나 허공에 드리워진, 마침내 투명한 액체로 화한 것은 지나간 추억이었다. 사방으로 떨어지고 드리워지는 청아한 물방울 위에 비친 내 모습이 초라해, 담담하려 노력한 마음마저 헛된 것이 되어 버렸다. 바닥에 단단히 고인 물결 위로는 시린 파도가 몸부림쳤다. 그저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아팠다. 이유 모를 고통이 나를 좀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