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당장 죽는다고 해도 난 절대 널 놓지 않아.

강태조, 허이연에게 필요한 10억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판 남자. 설사 그것이 이연과 자신의 할아버지의 모략이라고 해도 그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연은 눈앞에서 죽어 버렸다.

아니, 죽은 척했다. 그것도 무려 10년 동안이나.

태조가 어머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간 작은 병원에서
그녀는 도우미로 일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존재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는 듯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이제부터 기억해.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더 이상 너만 편하게 두지 않아.

저자 ♡ 하라

언젠가 타임머신이 나올 거라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중생임.
한때 ‘허접의 전당’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으나, 현재 ‘하라(hara)’라는 동명으로
인터넷 로맨스 소설 사이트에서 「청연」을 연재 중.

출간작 「지중해」, 「검은 태양」, 「모르핀」, 「비상시 문 여는 방법」
카페 로맨스 포에버 http://cafe.daum.net/RomanceForever

홱.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낯선 손이 이연의 팔을 움켜잡고 거칠게 돌려세웠다. 허리를 휘감는 팔. 익숙한 소나무 향. 이성보다 감각이 먼저 두려움에 떨며 상대를 인식했다. 이연은 들썩이는 가슴에서 눈을 들었다.
“또 도망가려고?”
화를 참는 듯 거친 숨을 내쉬며 태조가 이연을 노려보았다.
“도망치면 죽여 버린다고 했지?”
놀란 이연이 소리도 못 내고 입만 벙긋거렸다.
“아니면 죽여 버리기 전에 죽은 척한 거였어?”
좁은 복도 안을 공명하는 태조의 고성에 이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제기랄.”
태조는 이연이 으스러질 정도로 부둥켜안았다. 가슴이 벅찼다. 턱 아래 닿던 부드러운 머리카락, 좁은 어깨와 등, 그리고 목을 간질이는 숨결, 모두가 살아 있었다. 기억 그대로.
혹시나 하고 다시 돌아온 화장실이었다. 고장 난 화장실 칸막이 틈새로 보인 가느다란 손가락과 숨죽여 속삭이는 익숙한 목소리. 십여 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는 여자를 초조히 기다리면서 태조는 부질없는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명이인에, 생김이 비슷한 사람일 거라는 김 실장의 충고가 더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이연은 나타났다. 꽁꽁 숨었던 지난 십 년간의 숨바꼭질의 대미를 장식하듯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유령처럼 슬며시 나왔다.
태조가 이연을 품에서 떼어 낸 후 머리를 숙여 얼굴을 바라봤다.
“집에 가자.”
태조가 이연의 어깨를 안고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이연은 시멘트 바닥만 응시한 채 뿌리가 박힌 나무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말 들어! 너한테 화내기 싫어.”
태조가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을 실었지만 이연은 팔을 뿌리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연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작지만 또렷한 이연의 대답. 이연이 처음으로 태조를 똑바로 쳐다봤다. 충격이 많이 사라지고, 단호한 눈빛이었다.
“태조 오……. 아니, 강태조 씨한테 그렇게 불리기 싫어요.”
이연을 물끄러미 보던 태조가 피식하고 웃었다. 명쾌한 확인 사살. 정말 한때 죽었다고,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그날의 이연이었다. 글라스에 가득 채운 물처럼 화가 머리 꼭대기에서 찰랑거렸다.
“태조 오빠가 아니라 강태조 씨? 강태조 씨가 아니라 여보라고 불러야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이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죽은 줄 알았으니까 결혼은 무효가 됐을 텐데요?”
“죽은 척하면 혼인신고가 무효라고 누가 그래?”
태조가 병원에서 사흘 만에 깨어나 받은 것은 이연의 사망신고서와 화장된 유골을 한강에 뿌렸단 보고뿐이었다. 사고의 처참함을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일들. 하지만 이렇게 이연이 살아 있다면 사망신고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망진단서는 돈으로 조작 가능해도 사망신고는 법적 문제라 어찌할 수 없었을 터.
외면했던 이연이 태조를 돌아봤다. 두려움이 남아 있지만 뭔가 결심한 듯 단호한 표정.
“놔주세요.”
정확하게 말했으나 이연의 입술은 희미하게 떨렸다. 손과 발은 통제를 벗어났고, 이미 미친 듯이 펄떡이는 심장은 언제 멈춰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이연은 태조에게 이대로 잡혀갈 순 없었다.
“무슨 의미야?”
태조의 눈이 반으로 가늘어졌다.
놔 달라니? 이제 겨우 찾았는데? 정말 화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난 가지 않아요.”
“누구 맘대로?”
태조가 이연의 손목을 다시 거머쥐었다. 뼈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 이연은 내색하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깨물었다.
“제 인생이에요. 여기가 제 직장이고.”
짓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내 아내야!”
“그건 원치 않는 결혼이었어!”
이연은 오래전부터 품었던 생각을 격렬하게 토했다. 십 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 하지만 지금은 십 년 전과 달랐다. 말 잘 듣던 이연이 아니라 모진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여자였다. 태조가 잡은 손목을 거칠게 앞으로 당겼다. 단단한 태조의 가슴에 얼굴이 부딪히자 태조의 커다란 손이 이연의 턱과 뺨을 잡았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내려왔다.
“……원치 않았다고?”
태조의 거친 호흡이 이연의 입술을 스쳤다. 여름의 아스팔트 위를 떠도는 뜨거운 공기처럼…….
“그래. 원치 않았어, 단 한 번도.”
이연이 단호히 머리를 끄덕였다. 도로 담을 수 없는,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한동안 거친 호흡만을 내뱉던 태조가 잔혹할 정도로 가식적인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알고 있었던 일 아니었어? 넌 내 아내가 되기로 하고, 난 네 소원을 들어주고.”
이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10억을 구해 온 태조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던 합의서가 생각났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딴 소리, 두 번 다시 꺼내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