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 : 널 갖겠어 (19세이상) - 제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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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도서출판 청어람
작가명
제이오스
발행일자
2018/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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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품 상세 설명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었다. 오랜 시간 사랑했고 결실을 맺게 되어 행복했다. 그런데 그 행복이 산산조각 났다. 상처투성이인 내 앞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내게 각인된 것처럼 첫눈에 반했었다며 나를 갖겠다고 말한다.

       

       

      거대 로펌의 변호사인 해인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잘나가는 변호사다. 십년 전부터 첫눈에 반해 사랑해 왔던 도연과의 결혼을 앞두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거대 소송까지 잘 마무리하며 도연에게 찾아간 날, 그는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와의 결혼식 2주 전, 그와의 꿈 같은 신혼을 꿈꿨던 그 집, 그 침대에서. 그것도 자신의 의붓 여동생과…….

      파혼 후 별장에서 지내던 해인 앞에 동생 수인의 오랜 친구인 우진이 나타난다. 예쁘장하고 잘생겼던 아이가 건장하고 늠름한 남자가 되었다. 알 수 없는 설렘에 혼란스러워하는 해인에게 우진은 여전히 좋아한다며 불도저처럼 다가온다.

       

      ----------

       

      나는 이렇게 누나 한번 만지려면

      수십 번을 생각하고 고민한 후에 겨우 손을 뻗는데

      수인이는 이런 고민 안 할 테니까요.”

       

       

      우진이 너 이러는 거 이상해. 전엔 이러지 않았잖아.”

       

       

      우진의 손길이 해인의 귓가를 거쳐 목덜미로 내려왔다.

      나비가 꽃잎에 앉듯 손끝으로 닿을 듯 말듯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흐읍-. 해인의 입에서 절로 마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우진은 그 소리에 자극을 받았는지 손끝이 더 대담해지고 있었다.

      쇄골 라인을 따라 쓰다듬던 손길이 가슴골을 향해 천천히 내려왔다.

       

       

      그때보단 어른이 됐으니까 그에 맞게 대시하는 중이에요.”

       

       

       

       

       

       

       

      제이오스

       

      비 오기 직전의 비릿한 바람과 낮게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 함박눈이 쏟아지는 창밖 풍경, 담벼락을 여유롭게 걷는 도둑고양이……. 이런 것들을 보며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이 좋다.

       

      출간작

      전자책 <사랑도 중독이 되나요?>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를 탄 지 삼십여 분이 지났다. 왕복 2차선 도로에는 반대편 차선으로 지나가는 차들과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간간히 보일 뿐이었다. 녹청색 벼가 바람을 타고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우진은 창문을 내리고 팔을 바깥쪽으로 뻗었다. 살갗을 찌르는 따가운 햇살과는 별개로 기분 좋은 바람이 손바닥을 세차게 치며 지나쳐 갔다. 평화로웠다. 몇 달 만에 이런 소소한 평화로움을 만끽하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날아든 우편물 하나가 우진의 삶을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내용을 확인한 날부터 몇날 며칠 잠을 잘 수 없었다. 식욕도 없었다. 훈련 중에도 멍 때리다가 다른 선수들과 수도 없이 부딪쳤다. 감독과 코치에게 평생 들을 욕을 몰아들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농구는 스피드만큼이나 더더욱 동료 선수들과의 호흡이 중요했다. 그 와중에 개인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었다.

      작년 10월 말, 16-17 프로농구 시즌이 시작된 첫 경기에서 결국 사고는 터졌다. 국가대표 출신이기도 한 우진은 예상대로 선발로 출전했다. 하지만 경기 중 또 다시 사념에 빠져들었고 골대에 덩크를 하며 뛰어내리던 상대 선수의 팔꿈치에 그대로 안면을 가격당했다. 충격으로 넘어지면서 두 선수는 바닥에 뒹굴었고 그 과정에서 우진의 오른쪽 무릎이 90도 가까이 뒤틀렸다.

      -. 부상을 입었을 때 무릎에서 나던 소리. 선수들과 관중들의 함성 속에서도 그 소리가 선명하게 우진의 귀에 날아와 꽂혔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오른쪽 무릎이 욱신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전방십자인대파열 수술을 받은 후 삼 개월 동안 보조기를 차고 다니면서도, 재활치료를 받을 때에도 우진은 무릎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재활치료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선수 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온 신경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다 큰 사내자식이 충혈된 눈으로 자꾸만 눈물이 한가득 고이는 꼴이라니. 그나마 아무도 없는 차 안에 혼자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우진은 한숨을 쉬며 창문을 올렸다. 갑자기 차 안이 조용해졌다. 바람이 윙윙거리며 차 안을 훑어내던 소리가 없어져서인가.

      이십여 분을 더 달리자 기억 속에 익숙한 동네가 눈에 들어왔다. 거의 십년 만에 이곳에 다시 왔다. 한 여름 반짝거리던 추억이 많았던 곳. 달콤쌉싸름한 추억이 남아 있는 곳.

      이 동네는 변함이 없네.”

      우진의 차는 한적한 시골 동네로 들어섰다. 80년대에 세워진 듯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선 읍내를 서행하며 지나갔다. 길 양쪽으로 차들이 들쑥날쑥 주차돼 있고 그 사이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무단횡단이 너무나 익숙한 듯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걸음을 멈춰 서게 만드는 우진의 차를 노려보기도 했다.

      오래된 약국, 오래된 자전거 점포, 오래된 식당, 오래된 다방. 비뚤어졌거나 이름이 거의 지워진 간판들이 알아서 보라는 듯 무심히 점포들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거의 단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들 사이에 3층으로 우뚝 선 농협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이곳이 이 지역에선 읍내라고 불리며 번화한 곳이었다. 읍내통이 거의 끝나갈 때쯤 너른 마당이 있는 병원이 나타났다.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다른 건물들에 비해 멀쩡해 보이는 곳이었다.

      백강종합병원 연산분원. 우진은 입구에 설치된 대형 간판을 지나쳐 병원 뒤쪽에 주차를 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갈까 하다 마음을 고쳐먹고 건물 중앙 로비를 통과해 앞마당으로 나왔다. 커다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놓여 있는 나무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물고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조금 있으면 나오겠군.

      <도착.>

      우진은 문자에 다른 말은 쓰지 않았다. 이 녀석에게는 이걸로 족했다. 우진이 담배 한 대를 거의 피워갈 때쯤 눈앞에 어슬렁거리며 병원에서 걸어 나오는 수인이 보였다. 여전히 깔끔하고 잘생긴 녀석. 많이 닮았단 말이지.

      여어, 친구.”

      우진이 앉은 채로 오른 손을 어깨높이로 치켜들었다.

      이 자식. 형님 보고 인사 제대로 안 하냐?”

      형님은 무슨. 내가 너보다 생일 두 달이나 더 빠르거든?”

      운동선수란 놈이 담배 피냐?”

      얼마 안됐어.”

      우진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수인이 잡아채듯 빼서는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에 버리러 걸어갔다. 되돌아와 우진의 옆에 털썩 앉는 동안에도 계속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였다.

      넌 의사란 놈이 걸음이 그렇게 느려서야 어디다 쓰냐? 응급환자 와도 양반처럼 느릿하게 걸어 다니냐?”

      설마. 그땐 번개맨처럼 눈에 안 보일 정도로 날아다니지.”

      행여나…….”

      밥 안 먹었지? 집에 가서 먹자.”

      그래. 맛난 거 해주냐? 12첩 반상 기대해도 되지?”

      굶긴다?”

      , 네네. 주시는 대로 감사히 먹겠습니다.”

      수인이 우진의 어깨를 툭 치며 먼저 일어섰다. 천천히 일어서는 우진을 무심히 보던 수인이 주차장으로 앞서 걸었다.

      우리 별장 위치 기억나?”

      아니. 그땐 관리인 아저씨 차 타고 다녔잖아. 지금 찾아가기엔 애매하지. 주소도 모르고.”

      그럼 내 차 따라와. 오다 놓칠 것 같으면 전화하고.”

      내가 애냐? 서울도 아니고 이런 시골에서 앞 차 놓치게?”

      툴툴거리며 걷는 우진을 향해 수인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레 비웃음을 날렸다. 저 모습도 똑 닮았다. 젠장.

      궁금했다. 잘 지내는지. 행복한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묻고 싶은 말이 수천, 수만 가지였지만 우진은 속으로 꾹꾹 누르며 삼켰다. 지금 와서 알면 뭐 할까? 어디 사는지 알게 된다면 미친놈처럼 찾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진은 저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진의 은색 SUV가 수인의 소형승용차를 따라 달렸다. 이내 읍내를 벗어난 차는 좁은 시골길로 접어들었고 사유지.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사각 팻말이 꽂힌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얼마 가지 않아 갈색의 거대한 목조대문이 나타났고 수인의 차가 가까워지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대문에 센서까지 달았나 보네.”

      수인을 따라 우진의 차가 안에 들어서자 자동으로 대문이 닫혔다. 대문 안쪽은 좁고 우거진 숲길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포장된 길 양쪽으로 잘 손질된 조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에는 편백나무들이 빼곡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숲 안에 집에서부터 이어진 산책로가 있다는 건 이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앞서 가던 수인의 차가 주차장에 들어가지 않고 급정거를 하며 멈춰 섰다. 천천히 뒤따르던 우진도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저 자식, 왜 저래?”

      운전석에서 급하게 내려 집 쪽으로 뛰어가는 수인의 모습이 보였다. 우진도 시동을 끄고선 수인이 뛰어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냐? 잘 타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자전거를 타고 나가냐고.”

      수인이 마당 한편에서 웬 여자의 종아리에 호스로 물을 뿌리며 다리를 씻어주고 있었다. 여자의 앞에 쭈그려 앉은 채 바닥에 흐르는 물에 무릎 부분의 옷이 젖어 들어가는 것도 아랑곳 안 하는 눈치였다.

      우진은 수인을 내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길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아래로 잘록한 허리와 대조적으로 풍성한 곡선을 이루는 엉덩이, 핫팬츠 아래로 매끈하게 뻗어 내린 하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수인이 다리를 손바닥으로 훑어가며 씻어주는 동안 여자는 발을 들어 발가락 사이에서 조리를 까닥거렸다.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던 여자는 수인의 머리를 짚은 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해. 간지러워. 하여튼 호들갑은.”

      호들갑이 아니잖아. 한두 번이냐고. 이봐, 상처에 돌멩이 들어가 있잖아.”

      수인이 좁쌀만 한 돌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집어선 여자를 향해 들어 올렸다. 여자는 까닥거리며 흔드는 수인의 손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리고는 좀 전과는 반대쪽 발을 들어 올려 마찬가지로 발가락 사이로 조리를 까닥거렸다. 수인은 여자가 흔드는 발에 호스로 물을 뿌려주었다.

      들어가서 소독하고 연고 바르자.”

      됐어. 누가 보면 크게 다친 줄 알겠네. 무슨 의사가 이 정도 상처에 호들갑이야?”

      이런 상처 방치했다가 더 큰 병이 될 수도 있는 거야.”

      으이그.”

      수인이 여자의 양손까지 꼼꼼히 씻겨낸 후 호스의 물을 잠그는 사이 여자가 손, 발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듯 제자리에서 두어 번을 뛰었다. 우진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뒤돌아서는 여자의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그녀가 움직이는 모든 동작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낭랑한 목소리가 꿈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귓가에 울려왔다.

      우진은 눈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정말, 절대 믿을 수 없었다.

      …… ? 해인 누나?”

      우진의 목소리에 해인의 시선이 곧바로 향했다. 아몬드형의 커다란 눈동자가 예상치 못한 방문객에 당황했는지 처음엔 멈칫거렸지만 이내 상대를 알아보고선 만면에 환한 웃음이 퍼져 갔다.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붉은 입술 사이로 드러났다.

      , 서우진? 진짜 우진이야?”

      수인이 그제야 우진의 존재를 기억해낸 듯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누나, 우진이 기억하지? 이 녀석 당분간 여기…… , 이 자식, 너 뭐 해?”

      수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진이 좀 더 빨랐다. 우진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 이미 해인을 끌어안고 있었다. 우진은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단숨에 해인의 앞에 가 섰고 몸을 부스러뜨릴 것처럼 세게 품에 안았다.

      ……누나. 해인 누나. 해인 누나.”

      ? 어어.”

      목이 뒤로 꺾일 듯 우진에게 안겨 있는 해인이 당황한 눈빛으로 수인을 바라봤다. 수인의 표정을 보니 당황한 건 해인과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해인이 멈칫거리며 우진의 등을 토닥거렸다.

      아하하하. 우진이 오랜만이다.”

      해인은 품에서 벗어나보려 자신의 몸에 두르고 있는 우진의 팔을 잡고 아래로 힘을 줬다. 손바닥을 쫙 펴도 반도 채 잡히지 않는 우진의 단단한 팔은 해인의 손길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해인이 도와달라는 눈짓을 보내자 수인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우진과 해인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 자식, 너였으니 봐줬지 다른 놈이었으면 진작 뼈도 못 추렸어. 어디 감히 우리 누나를 끌어안…….”

      수인은 끝까지 말하지 않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진의 시선은 해인에게 못 박힌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수인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올곧이 해인만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다시 해인을 끌어안을 것 같은 태세로.

      수인은 자신이 집 안에 늑대 한 마리를 들여놓은 게 아닌지 후회되기 시작했다. 우진이라면 다른 녀석들과 분명 다를 테지만 아무래도 이 자식도 남자는 남자니까. 누나에게 늑대를 붙여주고 싶진 않으니까.

      , 서우진. 지금 당장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우리 누나한테서 눈 떼라. 그리고 차에서 짐부터 가져와. 알았어?”

      우진은 수인이 해인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잔소리를 한 후에야 정신이 든 듯 수인을 내려다봤다. 이 자식, 농구선수 아니랄까 봐 키는 커가지고.

      빨리 안 움직이냐? ? 이대로 서울로 다시 갈래?”

      수인은 다시 한 번 우진을 향해 으름장을 놨다. 오랜 죽마고우인 녀석이 제 누나를 향해 남자의 눈빛을 하는 게 영 불편했다. 누나와 우진은 서로 못 본 세월이 있었다지만 십년도 더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우진의 이런 반응은 수인에게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이었다.

      우진은 마지못해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뒤를 돌아 해인을 바라보는 모습이 귀신이라도 본 사람 같았다. 해인은 그런 우진의 모습을 수인의 뒤에 숨어서는 빠끔히 고개만 내민 채 바라보았다.

      진짜 우진이 맞지?”

      , 아닌 것 같아?”

      완전 남자다잉.”

      누나-.”

      수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해인을 어깨에 들쳐 업었다.

      , 내려. 내리라고.”

      시끄러워. 들어가서 소독부터 해. , 진짜 이 집에 골칫덩이가 늘어난 기분이야. 젠장.”

      해인이 수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흔들어도 수인은 아랑곳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침묵이 이어졌다. 우진은 식탁 맞은편에 앉은 해인의 존재가 실물인지 믿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해인을 봤던 건 그녀의 대학졸업식에서였다. 대학팀 훈련에서 이탈해 부랴부랴 갔던 졸업식장엔 학사모를 쓴 해인의 옆에 이미 다른 남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꽃다발을 든 해인의 약지 손가락에는 옆에 서 있는 남자와 동일한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머뭇거리며 다가서는 우진을 해인과 그녀의 가족들이 반갑게 맞아주었었다. 수인의 옆에 서서 함께 사진도 찍었었다. 해인의 그 남자가 사진을 찍어줬었다. 우진도 알고 있는 남자였다. 해인과 수인의 과외선생이면서 해인이 짝사랑했던 상대.

      해인 누나.”

      우진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음식 씹는 소리만 조용히 울리던 식탁의 정적을 깨뜨렸다. 우진의 부름에 해인이 고개를 들고 마주 보았다.

      여긴 언제 온 거예요?”

      ……?”

      선뜻 답을 하지 못하던 해인의 시선이 수인에게로 옮겨갔다.

      좀 됐어, 인마. 밥이나 먹어.”

      해인 대신 수인이 대답했다. 해인이 우진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넌 우리 병원에서 재활치료 계속할 거지?”

      수인이 대화의 초점을 우진에게로 돌렸다. 우진은 해인에게 더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 다음 주부터 시작하려고.”

      김 과장님 본원에 있다 오신 데다 실력도 있으니까 안심하고 치료 받아라. 너 프로 복귀해야지.”

      그래.”

      아버지도 걱정 많이 하셨어.”

      ……그동안 원장님 덕 많이 봤지. 아들 친구라고 신경 많이 써주시더라.”

      우진은 머릿속으로 한동안 기현이 왜 해인에 대해선 자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오래 알고 지내온 만큼 우진을 아들처럼 스스럼없이 대했던 기현이었다. 해인과 만나지 못하던 동안에도 우진은 기현과 수인을 통해 항상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거대 로펌에 합격한 거며, 매번 승소를 하고 있다는 얘기며, 약혼했다는 얘기까지.

      우진이 어디 아파? 다쳤어?”

      관심 없는 듯 우진과 수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해인이 참지 못하고 얘기에 끼어들었다. 우진이 경기 중 부상을 입었던 일을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프로농구 서우진 선수 경기 중 부상소식은 방송사 스포츠뉴스를 비롯해 일간지, 인터넷 상에서 한동안 떠들썩했었다. 영국 런던올림픽에 국가대표로 뽑히면서 팬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농구선수 서우진은 유명인이 됐었다. 한국 남자 농구는 예선에서 떨어졌지만 훈남 농구선수 서우진은 많은 여성팬을 갖게 되었다. 그런 우진이 시즌 오픈하자마자 부상을 당했고 선수 생명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소식은 팬들에게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로 떠들썩했던 사건을 해인은 전혀 모르고 있다니 우진은 의아했다. 자신이 유명인이라서가 아니라 이 정도까지 세상 소식을 모를 정도로 해인이 바쁘게 지냈던 걸까 그 점이 의아했다. 기현이나 수인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걸까?

      이번에는 우진이 옆자리에 앉은 수인을 바라봤다. 해인 누나가 왜 모르고 있지? 라는 물음을 가득 담고. 수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누나, 우진이 경기하다가 좀 크게 다쳤었어. 아버지 병원에서 수술 받고 재활치료 받아왔고…….”

      해인에게 향했던 수인의 시선이 우진에게로 돌아왔다.

      누난…… 누나는 개인적인 일로 한동안 정신없었어. 너 다쳤을 즈음이었거든. 그 뒤엔 너 다쳤다는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고 해야 할까?”

      , 그랬구나.”

      해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 우진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지금은 괜찮아? 어딜 다친 거야?”

      ……무릎이요. 지금은 괜찮아요.”

      ,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한동안 계속 재활 받아야 해. 연골판까지 찢어졌었거든. 너 게으름 피울 생각 말고 다음 주부터 빡세게 치료받아. 나중에 퇴행성관절염이라도 오면 어쩔 거야. 알았지? 그 조건으로 이 형님이 너 여기 와 있는 거 용납해 준 거니까.”

      , 뭐라는 거야. 이 자식. 걱정 마.”

       

      식사 후 설거지를 하던 수인은 거실에 있던 해인을 불렀다.

      누나, 샤워하고 내려와. 자기 전에 연고 다시 발라줄게.”

      , 됐어.”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던 해인은 미동도 안 한 채 수인에게 소리를 질렀다. 1인용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우진의 눈에 해인의 다리 곳곳에 붙어 있는 밴드가 눈에 들어왔다. 양쪽 무릎에는 하얀색 거즈가 정사각형으로 잘라져 반창고로 고정되어 있었다.

      어쩌다 다친 거예요?”

      이거?”

      우진의 시선을 따라 해인이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무릎에 붙인 반창고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자전거 타다가 넘어졌어. 집에서 자전거 타고 이십분 정도 가면 강이 있거든. 바람 쐬러 다녀오다 넘어졌어.”

      이장 아저씨가 심심하면 배 띄우고 낚시하던 거기?”

      , 거기. 맞다. 너도 예전에 여기 왔었지? 기억하는구나?”

      우진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누난, 나 여기 왔던 거 잊고 있었어요? 난 한 번도 잊은 적 없는데…….”

      해인의 얼굴이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걸 슬그머니 풀어 바닥으로 가지런히 내리곤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누나, 빨리 씻고 내려오라니까? 말 안 들으면 또 들어다 욕실에 집어넣는다?”

      , 저 녀석 진짜……. …… 씻어야겠다. 나중에 보자.”

      해인은 우진을 스쳐 지나 부랴부랴 2층으로 올라갔다. 우진은 그 모습을 말없이 눈으로 좆았다. 해인은 분명 자신의 시선을 느끼고 자세를 고쳐 앉았었다. 해인은 우진이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러기엔 그동안 만나온 여자들의 수가 열 손가락 꼽기를 두 번 이상은 해야 했다.

      우진은 애인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관계를 갖거나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 외에도 우진을 향해 몸으로 말하고자 하는 여자들은 주위에 널렸더랬다. 그들 중 어느 누구와도 사귀고 싶단 마음이 들지 않았다. 미친 놈 같겠지만 그 여자들을 안으면서도 우진의 머릿속에는 해인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러니 해인의 작은 몸짓이나 눈빛에 자신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했다.

      우진은 해인의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인 2층 계단을 넋 놓고 바라보느라 수인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멍하니 뭐 하냐?”

      내가 환영을 보는 게 아닌가 싶어서…….”

      뭐라는 거야. 너 오늘 자꾸 이상한 짓만 한다?”

      그래?”

      해인이 방금 전까지 있던 자리에 앉는 수인에게 캔 맥주 하나를 건네주고는 퉁- 소리가 나도록 부딪쳤다. 시원한 맥주가 부드럽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게 꽤나 기분 좋아지게 만들었다.

      우리 누나…….”

      수인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계단을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우진은 맥주를 마시려던 걸 멈추고 수인을 쳐다봤다.

      파혼했어.”

      우진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유는 아직 듣지도 못했는데 다행이다 싶으면서 순간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 ……? 그 사람이랑 꽤 오래 사귀었잖아.”

      바람피웠어.”

      누가?”

      우진은 질문을 해놓고도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설마 해인 누나가 바람을 피웠을까. 해인은 고3 때부터 그 남자를 일편단심으로 좋아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은 항상 해인의 뒷모습만 바라봐야 했었고.

      우진의 생각을 읽었는지 수인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누나의 십년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어. 망할 자식.”

      해인 누나 같은 여자를 두고 바람을 피우다니. 이해할 수가 없네.”

      상대가…….”

      또 뭐, . 말을 해.”

      예뻐. 너도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 예뻐봤자지. 예쁜 여자가 어디 세상에 한둘이야?”

      톱 탤런트 채서라 딸 채서현이야. 살아 있는 인형이라고 어려서부터 TV에 가끔 나왔잖아.”

      우진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수인이 하는 말을 이해하는 데 수 초가 걸렸다. 그동안 너무 운동만 해대서 머리가 나빠진 건지 수인의 말이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데까지 한참이 걸렸다. 채서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얼마나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방송이건 실물이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채서라는 알고 있었다.

      채서현…… 채서라? 너희 아버지랑 재혼했었던 그 채서라?”

      . 맞아.”

      잠깐, 나 지금 머릿속에 나사가 하나 빠진 기분이다. 그럼 그 자식이 바람피운 여자가 채서라의 딸 채서현이라면, 자기가 결혼할 여자 의붓 여동생이랑 바람을 피웠다는 거야? 이 미친 새끼가…….”

      덕분에 아버진 재혼한 지 삼 개월 만에 초스피드로 이혼했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 누나 일이라면 나보다 더 벌벌 떨잖아. 한바탕 난리 났었어. 누나 일 알고 나서 바로 채서라 씨랑 갈라서더라고.”

      우진이 분노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수인은 담담한 듯 캔에 남아 있던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 자식 죽여 버릴까?”

      , 네가 왜? 나도 그렇고 누나도 가만히 있는데.”

      개자식.”

      우진은 이로 자근자근 자신의 입안을 씹었다. 수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해인이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도, 그와 결혼한다는 것만으로도 우진은 그에게 적의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식이 해인을 배신하다니, 그것도 의붓 여동생과 바람을 피우다니 이제는 적의가 살기에 가까워졌다. 내 다리가 이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녀석이 원인이기도 하니까.

      빌어먹을.”

      우진이 들고 있던 캔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졌다.

      해인은 고등학교 시절 이미 자신보다 두 뼘이나 키가 큰 우진에게 고백을 받을 때마다 더 크고 나서 얘기하라며 어린애의 순정쯤으로 취급했었다. 끊임없이, 아무리 자신의 마음을 내비쳐도 해인은 항상 그 남자를 선택했었다. 그 마음을 존중했기에 나중에는 해인의 사랑을 응원하기도 했었다. 속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겉으로는 동생의 친구로서 역할에 충실했다.

      그것조차도 해인의 대학 졸업식을 기점으로 포기해 버렸었다. 더 이상 아무렇지 않게 해인을 마주 볼 용기가 없어 그녀의 앞에 나타나기를 멈췄었다. 보고 싶었고 소식이 궁금했지만 수인이나 기현이 먼저 말해주지 않는 이상 알려 하지 않았다.

      수인에게 해인의 청첩장을 받았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넋이 나갔고 몸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부상을 입었고 선수 생명은 위기에 닥쳤다. 우진은 문득 남을 탓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부상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건 비겁했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게 만들었어야 했다. 해인이 거부하고 또 거부해도 계속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또 표현했어야 했다. 우진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이제 단 한 가지였다.

      내가 갖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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