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릿광대의 동화(전3권) - 네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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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뮤즈
작가명
네르비
발행일자
2018/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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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품 상세 설명

       

       

      아가씨, 본래 인생에 사랑과 복수만큼 의미 있는 것도 드물어.

      제발 좀 닥쳐 줄래?”

      복수는 할 일이 없을수록 좋지만, 사랑은 다르지. 많을수록 좋은 게 바로 사랑이야!

      ……아무래도 난 전생에 나라를 열 개쯤 팔아먹은 것 같아.”

       

       

      마녀가 만들고 수상쩍은 광대가 운영하는 마법의 놀이공원을 찾아간 연두는 인형들에게 붙잡혀 인형들에게 붙잡혀 신데렐라를 비롯한 동화 속의 주인공들이 같은 세계에서 뒤엉켜 살아가는 곳에 떨어진다.

      연두는 팔자에도 없는 요정대모 노릇을 하며 동화 세계에서 악전고투를 벌인다. 연두와 광대를 삼킨 인형의 집은 손님이 가장 원하는 것을 보여준다는데……. 연두와 광대는 무사히 동화를 끝마치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네르비

       

      뜨거운 커피와 따끈따끈한 고양이를 사랑하는 30대 여자. 생명력 넘치는 글로 독자들에게 기억되는 것이 꿈.

      <장미 정원의 주인>(전자책)

      <내 나비는 날아가 버렸다>

       

       

       

       

       

       

       

       

       

      아침나절부터 하늘이 우울하더니 점심때가 채 되기도 전부터 비가 내렸다. 포장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좁은 골목길은 순식간에 흙탕물이 고인 진창으로 변해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그런 와중에 어느 음식점 문이 거칠게 열리고, 웬 여자가 밀려 나자빠졌다. 대충 묶은 긴 갈색 머리카락이 온통 진흙으로 더럽혀지고 낡아빠진 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그 위로 걸쭉한 욕설이 쏟아졌다.

      너 같은 이민족은 안 받는다니까!”

      시켜주시면, 열심히,”

      내가 널 뭘 믿고! 꺼져! ,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이상한 게 다 꼬여들어. 에이, -!”

      앞치마와 국자를 휘두르며 여자를 쫓아낸 가게 주인이 길바닥에 가래침을 거하게 뱉고 돌아섰다. 흙바닥에 처량하게 앉아 있던 여자는 곧 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로 얼굴도 씻고 머리카락도 정리하는 게, 놀라울 정도로 신경이 두껍다.

      에이씨. 이렇게 쫓겨나는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괜찮아, 강연두. 오늘은 비도 오고 기분도 더럽고 아주 좋네.”

      밀려 넘어진 여자는 바로 연두였다. 드림랜드에서 인형들에게 떠밀려 이 괴상한 세상에 떨어진 지 벌써 두 달. 인형이 움직인 것도 안 믿기는데, 눈 감았다 뜨니 현대 유럽에서 시계를 사백 년쯤은 뒤로 돌린 것 같은 세상이었다.

      아기자기한 높이의 건물들, 포장되지 않은 좁은 골목길, 대로를 달리는 마차, 더러운 무명옷을 입고 총총히 걷는 사람들…… 낯선 풍경들로 가득 찬 세상. 귀족과 평민이 있는 걸 보면 언뜻 봐도 전근대 사회인데, 그 와중에 설탕이나 차 같은 고급 기호품이 평민들 사이에서도 유통되니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세상인지 알 길이 없다. 그 와중에도 소금은 값비싸니 참 우스운 일이었다.

      믿기 힘든 현실에도 배는 고팠다. 지금 연두는 먹고살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이제껏 그녀가 배워 익힌 모든 것들이 이곳에선 하등 쓸모가 없었다. 말이라도 통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디 나 써줄 곳 없나…….”

      엉망인 채로 비를 맞으며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모양새에 기겁한 주민들이 슬슬 연두를 피했다. 이 작은 마을에서 그녀는 나름 유명 인사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일자리를 찾는 이민족 여자. 불행과 불운은 언제나 외부에서부터 오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민족이면서 이방인인 연두는 그런 어두침침한 것들의 결정체로 여겨졌다. 해코지를 하지 않는 건 혹여 돌아올지 모를 저주가 무서워 그러는 것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또 알아도 무시할 수밖에 없는 연두는 그제 두드린 문을 어제도 두드리고, 오늘도 두드리며 제발 일을 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이 가게, 저 가게 머리를 들이미는 족족 쫓겨났다. 뿌리는 구정물을 피해 달아나고, 어설픈 빗자루질에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았다. 어제는 연두에게 쓰레기통을 내던졌던 여관의 주인이, 오늘은 그녀를 불쌍하게 여겨 빵 한 조각을 주었으니까. 오늘의 첫 끼였다. 여관 주인은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혀를 찼다.

      , 안 쓴다니까 왜 자꾸 와?”

      오늘은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잖아요.”

      하여간 이민족 종업원을 누가 쓴다고.”

      연두는 여관 주인의 투덜거림을 못 들은 척했다. 마을 주민들이 이민족에 대해 갖는 반감 따위 알 게 뭐냐. 자신감만 떨어질 뿐이었다. 그녀는 바짝 말라 돌덩이 같고 이가 부러질 것 같이 딱딱한 빵조각을 후딱 먹어치우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쿼터라서 다행이야. 순수 동양인이었으면 벌써 끌려가 죽었겠네.’

      정말 그랬다. 한국에 있을 때는 혼혈도 아닌 쿼터인데도 너무나 도드라지는 이목구비 때문에 몰려드는 시선이 짜증나 돌아버릴 것 같더니, 여기선 그 도드라진 외할머니의 핏줄에 엎드려 감사의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이민족에 대한 경계심이 이렇게 심할 줄이야.

      이놈의 핏줄에 고마워하는 날이 다 오네. 외가라고는 들은 것밖에 없는데…….”

      희미한 기억조차 남아 있지 않은 외가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비가 그쳤다. 가게 문만 보며 걷던 연두는 자신이 마을의 대로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쏟아지는 시선의 양이 엄청났다. 잘하면 얼굴에 구멍이라도 날 것 같다.

      하지만 시선이 무섭다고 도망쳐 봐야 뭐 나오는 것도 없는 노릇이라, 연두는 짐짓 뒷짐까지 지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달려오던 마차가 바닥에 고인 흙탕물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어어, 하는 순간 연두는 흙탕물을 홀딱 뒤집어쓰고 말았다.

      뭐 이런……. 염병, 목욕해도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씻기야 마을 바깥의 강에서 씻는다지만, 옷은 어쩐담. 연두가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는데, 조금 전에 그녀를 지나쳐 갔던 마차가 되돌아왔다. 그러더니 연두의 앞에서 딱 멈춰 서는 게 아닌가. 흔한 짐마차도 아니고 고급스러운 문장이 새겨진 귀족의 마차다. 어안이 벙벙해진 그녀의 눈앞에서 벌컥, 문이 열렸다. 젖은 거리의 눅눅한 냄새를 모두 날려 버릴 듯한 향기가 쏟아졌다.

      미안하구나. 괜찮니?”

      비단드레스를 몸에 두르고 색색의 보석으로 금발 머리를 장식한 귀족 영양이 연두를 향해 상냥하게 물었다. 깊은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보통의 마을 주민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당장 마차 앞에 엎드려 빌었을 테지만, 연두는 아직 신분제가 몸에 배지 않았다. 그녀는 빳빳하게 선 채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다지 괜찮지는 않네요. 갈아입을 옷이 없거든요.”

      연두를 빤히 바라보던 귀족 영양이 빙긋 웃었다. 안 그래도 예쁜 얼굴에 웃음이 걸리자 주변이 다 환해졌다.

      재미있는 아이네. 유모, 저 아이를 태워.”

      아가씨. 불쌍해 보여도 이민족인데요.”

      괜찮아. , 키만 껑충하지 말랐잖아. 게다가 기껏해야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뭐가 위험하겠어. , 이리 타렴. 갈아입을 옷도 주고 먹을 것도 나눠주마.”

      정말 타도 되는 걸까. 달콤한 사탕을 주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건 고금에 통하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두는 유괴범이 내미는 사탕조차 아쉬운 처지였다. 그녀는 찔러죽일 것만 같은 유모의 시선을 무시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은 따뜻하고 안락했다. 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마차 바닥을 더럽히는 게 무척이나 신경 쓰일 정도였다. 연두는 슬그머니 치맛자락을 한쪽으로 모아 쥐었다. 귀족 영양은 그녀가 하는 양을 퍽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이름이 뭐니?”

      강연두입니다.”

      먹을 것도 주고 옷도 준다는데 조금 전처럼 빈정댈 수야 없는 노릇이다. 연두는 제법 깍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게 또 흥미로웠던 모양인지, 귀족 영양의 눈이 가느다랗게 접혔다.

      …… , . 역시 이민족의 이름은 발음하기가 어려워. 뜻이 있는 이름이니?”

      색 이름이에요. 막 돋은 새싹의 색이죠.”

      출신지는?”

      한국이요.”

      처음 듣는 지명이야. , 내가 이민족의 지명 전부를 아는 건 아니니……. 나이는?”

      연두의 나이는 올해 스물아홉.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이니, 만으로 치면 스물여덟이다. 연두는 나이를 말하기 전에 잠깐 고민했다. 이걸 사실을 말해야 하나, 말해야 하나. 흘끗 바라본 귀족 영양은 아무리 잘 봐줘도 십대 후반. 연두는 입술에 살짝 침을 발랐다. 어릴수록 경계심이 옅어진다는 건 만고불변의 법칙이었다.

      올해 열여덟 살이요.”

      더 어릴 줄 알았는데 나보다 한 살이나 더 많구나. ……. 강영…… 아니, 강연두. 나는 이 마을의 주인이신 파르만 백작님을 아버지로 둔 아셰라드 블루벨 파르만이란다. 이제부터 내가 널 그린이라고 부를 테니, 내 아래에서 하녀로 일하도록 하렴.”

      아가씨!”

      아셰라드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유모가 새된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그저 즐거워 보였다. 연두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일자리였다. 그린이든 하녀든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고용주님이신데!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나야말로 그렇단다.”

      그날, 파르만 백작가에는 보기 드문 이민족 하녀가 한 명 추가되었다. 그리고 연두가 하녀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고 주변 환경은 급격하게 변해갔다.

       

      오랫동안 사람이 쓴 적 없는 저택 꼭대기의 작은 방은 해가 잘 들지 않아 어두웠다. 연두는 벌써 세 개째인 걸레로 벽과 바닥에 피어오른 곰팡이를 닦아냈다. 한층 더 진해진 물 얼룩이 까맣게 썩어가는 나무 바닥에 불길한 자국을 남겼다. 하루만 지나도 다시 곰팡이가 필 것 같았다.

      곰팡이 전용 세제…… 아니, 락스 한 통만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런저런 세제들을 떠올리던 연두의 입에서 땅이 꺼졌나 싶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인생……. 참 거지같다.”

      팔자에도 없던 하녀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의식주가 다 해결되니 어떻게든 살겠구나, 하고 살았는데 요새 사정은 또 그게 아니다. 연두가 일하는 저택의 주인인 파르만 백작은 현재 실종 상태였다. 그것도 거의 일 년째.

      그러게 재혼은 상대를 봐가며 해야지.”

      파르만 백작은 아셰라드의 가정교사와 재혼을 한 로맨티스트였는데, 그녀의 두 딸 역시 입양을 결정할 정도의 호인이었다. 문제라면, 새 백작부인은 절대 호인이 아니라는 것이겠지. 파르만 백작이 실종되고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저택 내의 권력구도는 기묘하게 흘러갔다.

      남은 친자식 구박할 만한 여자랑 결혼하면 어떡해? 하여간 눈이 땅바닥에 붙어 있지. 이건 뭐, 신데렐라가 따로 없어.”

      덜렁 혼자 남은 친자식인 아셰라드는 어, 하는 사이에 손발을 다 잃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들도 죄다 빼앗겼다. 그녀를 위해주던 고용인들은 갖가지 핑계에 치여 다 잘려 나갔고 남은 고용인들은 백작부인 눈치를 보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다.

      그러니 아셰라드가 직접 데려온 이민족 하녀인 연두의 일자리도 바람 앞의 촛불 신세. 언제 잘릴지 모를 슬픈 인생이었다. 주인의 처지에 따라 인생이 뒤바뀔 위기에 처하다니, 연두로서는 생각해 본 일도 없는 사태였다.

      걸레질 한 번에 망할 백작나리, 걸레질 두 번에 망할 백작부인, 걸레질 세 번에 망할 아가씨들. 욕을 왁스처럼 발라 문지르는 손이 제법 야무졌다. 비를 맞으며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아셰라드에게 주워져 하녀가 된 지 어느새 일 년. 백작의 실종을 이민족인 연두 탓으로 돌리던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견딘 시간이 벌써 그만큼이다. 그동안 연두는 프로 하녀가 되어 있었다.

      그린! 새 물 떠왔어.”

      고마워, 마고. 다들 뭐래? 조용히 해주겠대?”

      그럼. 아가씨께 죄송한 게 너뿐인 건 아니잖아.”

      ……그건 그래.”

      양동이에 깨끗한 물을 가득 담아온 마고가 끙차, 소리를 내며 문턱을 넘었다. 마고는 나이는 어려도 하녀로 잔뼈가 굵은 소녀였다. 연두는 이곳에서 열아홉 살 행세를 하고 있으니, 일단은 동갑이다. 연두와는 같은 방을 쓰는데, 이상할 정도로 연두를 챙기며 함께하길 원하는 경향이 있었다.

      연두가 양동이에 냅다 걸레를 처박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 때문에 등줄기까지 아찔해졌다. 손이 자꾸만 곱아드는 통에 설렁설렁 빠는데도 물이 순식간에 검게 변해갔다. 금세 새 물을 떠와야 할 상황이 되자 마고가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연두는 그녀의 표정을 모른 척하며 다른 소리를 했다.

      마님은 모르시겠지?”

      알아도 모른 척하시겠지. 본래 고용인들 사이의 일에는 주인이 참견 안 하는 거라고.”

      그럼 다행이고.”

      백작부인이 차근차근 아셰라드를 괴롭히기 시작한 시간이 거의 반년. 이제 아셰라드는 살아 있는 유령이었다. 생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인형 같은 낯을 하고 있는 아셰라드를 떠올릴 때마다, 연두는 까닭 모를 불편함과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곤 했다.

      그건 이제 갓 열여덟 살 어린 나이에 안쓰러운 일을 겪은 아셰라드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고, 그녀를 연민하면서도 혹여 밥그릇이 깨질까 두려워 외면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이런 감정을 가진 건 연두만이 아니었다. 아셰라드가 유리구슬 같은 푸른 눈동자로 무심히 시선을 줄 때마다 남은 고용인들은 천하의 몹쓸 죄인이 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하긴, 그러니 아셰라드가 제 방을 새언니들에게 빼앗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 방을 내어준 것일 테다. 이 더럽고 어두운 골방마저 없다면 아셰라드는 정말 벽난로 앞에서 자야 할 판이었으니까. 혹여 백작부인에게 들키는 날에는 아셰라드가 알아서 방을 찾아 들어갔다고, 우린 아무것도 몰랐다고 거짓말을 하기로 다 같이 약속까지 하고서 말이다.

      그러나 그런 호의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아셰라드가 머물 골방을 청소해 주거나, 가구를 마련해 줄 생각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는 소리다. 결국 지금 연두와 마고가 골방 청소를 하고 있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호의의 발로였다.

      아아-! 끝이 없어!”

      끝없는 곰팡이 행렬에 질려 버린 마고가 걸레를 내던지고 벌렁 드러누웠다. 연두는 그녀가 드러누운 바닥에도 곰팡이가 있다는 걸 지적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곰팡이 없는 곳을 찾기 힘든 방이었다. 미처 손대지 못한 천장 구석에는 허옇게 거미줄까지 끼어 있었다.

      그린, 있잖아.”

      왜 불러?”

      도대체 아가씨를 왜 돕는 거야?”

      어느 아가씨? 하고 되물어볼 수도 있었다. 백작부인이 데려온 두 딸 역시 이 집의 아가씨들이긴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회피해 버리기엔 마고의 눈이 너무 진지했다. 연두는 결국 한숨과 함께 걸레를 내던지고 마고의 옆에 드러눕고 말았다. 물먹은 나무 바닥은 축축하니 불쾌했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불쌍하니까?”

      퍽이나 불쌍하겠다. 좋은 집에서, 귀한 신분을 타고나서, 먹을 것, 입을 것, 아쉬운 것 없이 자랐잖아. ,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모두 잃은 건 좀 불쌍하긴 하지.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이 저택 바깥으로 나가면 아셰라드 아가씨보다 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애들은 널리고 널렸다고. 지금 쫓겨난 거? , 아가씨는 혼기가 찼어. 보는 눈이 무서워서라도 마님은 나름 괜찮은 혼처를 골라주실 거야. 그럼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텐데, . 잠깐의 고생이야 할 수도 있지.”

      영리하고 냉정한 분석이었다. 연두는 마고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 놀라고 말았다. 마고는 하녀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하면서도 하녀장에게는 예쁨을 받았다. 중간관리자와 하급 고용인들 모두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로 처세술이 대단한 소녀긴 했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대단한 연기력이었다. 분명 현대를 살았다면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쯤은 껌으로 탔을 테다. 연두는 솔직하게 물었다.

      그럼 뭐 하러 날 따라와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거야?”

      마고가 진지하게 손가락 하나를 폈다.

      첫째. 우리 집은 파르만 백작님께 도움 받은 게 많아. 유일하게 그분의 피를 이어받은 아가씨이니, 걸레질 몇 번이야 못할 것도 없지.”

      다른 아가씨들도 계시잖아.”

      우리 그 잡것들에게 안 들리는 곳에서까지 아가씨 소리 붙이지 말자. 운이 좋아 아가씨 소릴 듣는 것들이잖아. 마님이야 귀족 출신이 확실하다지만 그 딸들도 그런지 어떻게 알겠어?”

      마고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를 비롯한 저택의 고용인들은 새로운 아가씨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새 백작부인은 사별한 전 남편이 귀족이었다고 했지만, 고용인들은 그 말을 좀체 믿으려 들지 않고 출신을 알 수 없는 잡것들이라며 우습게 여겼다. 나름 합당한 이유도 제시했다. 새 아가씨들의 평소 행실이 아셰라드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식탐이 많고, 품위에 맞지 않는 어휘를 쓰고, 몸짓이 아름답지 않다고.

      그러나 출신이 모든 걸 설명하지 않는 곳에서 온 연두는 그들이 아마 진짜 귀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어질 정도로 얄밉게 굴긴 해도, 어렵게 자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해도, 귀족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작이 굳이 딸로 받아들인 이유를 납득할 수 없으니까.

      연두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마고는 김이 샜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이민족 하녀라 경원시되던 연두가 하녀들 사이에 무사히 스며든 건, 마고의 도움도 있었지만 상대가 누구든 험담에는 끼어들지 않는 이런 태도 덕분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명랑하게 두 번째 손가락을 폈다.

      그럼 둘째. 마님이 아무리 위세를 휘두르며 당당하게 구셔도, 어차피 가문의 인장은 아셰라드 아가씨가 갖고 계셔. 다른 계집들 혼인이라도 시키려면 반드시 아셰라드 아가씨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 그러니 이런 기회에 아가씨에게 눈도장을 쾅 찍어놔야 나도 괜찮은 남자에게 시집을 갈 수 있지 않겠어? 혹시 시집가실 때 데려가주시기라도 하면 더 좋고.”

      연두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가문의 인장 생각을 한 게 어디 마고뿐이었겠는가? 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당장 백작부인에게 걸려 호된 꼴을 당하고 쫓겨나면 눈도장이고 나발이고 없어 다들 모른 척하고 있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무슨 소리인지. 아셰라드가 인장을 빼앗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느냐는 말이다. 연두 본인이야 어차피 눈엣가시 같은 이민족 하녀라 언제 내쫓겨도 이상하지 않다지만.

      하나 연두가 무슨 표정을 짓든 마고에게는 별 상관없는 얘기였다. 마고는 배를 깔고 엎드리는 걸로 자세를 고치고 연두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셋째. 사실은 이게 가장 큰 이유인데 말야. 그건 바로 너야. 그린, 네가 아가씨를 지지하고 있으니까.”

      ……그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나야 아가씨께서 주워주셨으니까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는 거지.”

      네 고향의 속담은 쓰지 말아줄래? 못 알아듣겠단 말이야. 아무튼 난 너한테 걸었어. 네 뒤만 따라가면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거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너 미쳤어?”

      , 본래 인생은 도박이야. 난 이날 이때까지 도박에서 진 적 없어.”

      마고는 황당함에 말을 잃은 연두를 내버려 둔 채 다시 벌렁 드러누웠다. 말도 안 되게 영리하다가도 어느 때엔 영 허술한 이민족 신참 하녀의 뒤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은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자신도 잘 대답하기가 힘들 테지만, 그래도 분명히 이 길이 맞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드는 걸 어찌하겠나. 마고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그린이 그렇게 대단하니?”

      !”

      아가씨!”

      넋을 빼놓고 있던 연두와 마고가 기겁을 하고 튀어 올랐다. 허겁지겁 옷자락을 다듬는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셰라드의 시선은 그저 건조하고 퍽퍽했다. 그녀는 초라한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여미며 남은 계단을 마저 올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초라하고 더러운 다락방은 연두와 마고가 그토록 애를 썼음에도 그리 나아지지는 못했다. 벽과 바닥은 곰팡이 자국으로 온통 시커멨고 천장 구석엔 미처 떼지 못한 거미줄이 허옇게 매달려 있었다. 나무 바닥은 걸을 때마다 불안하게 삐걱거렸고 아귀가 맞지 않는 창문은 작은 바람에도 나 죽네 비명을 지르듯 덜그럭거렸다.

      방이 그 꼴인데 가구 역시 성할 리 없다. 지푸라기를 넣어 속을 채운 침대는 하녀들이 쓰는 것만도 못했고 작은 서랍장은 다리 하나를 잃어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했다. 하나 그 방에 가구라고 할 만한 건 그것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호화로운 가구에 둘러싸여 자랐던 아셰라드다. 이 방이 마음에 차지 않을 게 분명한데, 그녀는 의외로 별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다는 것처럼 침대를 의자 삼아 앉고는 안절부절못하는 두 하녀를 손짓으로 바닥에 꿇어 앉혔다.

      하녀장이 그러더구나. 난로 앞에서 쭈그려 자고 싶지 않다면 이 다락방이라도 쓰라고. , 청소를 하고 가구를 들이는 건 내가 알아서 할 몫이니 그건 각오하라고.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싶어 와봤는데…….”

      아셰라드가 천천히 방을 훑었다. 두 하녀는 그 서늘한 시선이 닿는 곳마다 미처 닦지 못한 곰팡이 얼룩과 거미줄과 쥐똥을 발견하며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만끽했다. 분명 몇 번이나 치웠는데 왜 저리 더러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생했구나.”

      혼나지 않아서 기쁘긴 한데 뭔가 불안하다. 담박한 치하의 말은 두 하녀를 더 움츠러들게 하고 말았다.

      아셰라드는 아예 바닥을 파고 싶어 하는 둘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백작부인의 통제가 꽤나 삼엄했던 걸로 아는데, 미움 살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도운 하녀들이다 보니 부족함을 탓할 마음이 나질 않았다. 그러함에도.

      아직 대답을 못 들었단다. , 마고. 대답해 보렴. 그린이 그렇게 대단하니? 네가 해고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날 도울 만큼?”

      , 아가씨…….”

      네 얄팍한 속내는 내가 이미 다 들었으니 이제 와서 회피하지 말려무나. 나는 그냥 궁금한 거란다. 네가 도박을 하는 이유가 내가 아니라는 게 말이다.”

      마고의 낯빛은 이제 불쌍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차마 제대로 된 단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벙긋대는 입에선 색색대는 숨소리만 새어나왔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연두가 나서려던 찰나, 아셰라드가 마고를 손수 일으켜 세우고는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귀한 아가씨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마고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이왕 돕기로 하였으니, 네 진심을 얻고 싶구나. 다음엔 그린을 따라서 날 돕는 게 아니라 진정 내가 좋아서 날 따랐으면 좋겠어.”

      ……! , 아가씨!”

      이만 내려가 보렴.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다정한 염려의 말에 마고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고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인사를 하고 후다닥 다락방에서 사라졌다. 연두는 그 뒷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어 얼른 따라 내려가는 것도 잊어버렸다. 금방 생각해 내긴 했지만, 그땐 이미 늦은 뒤였다. 아셰라드가 연두와 눈을 마주치고 방긋 웃은 것이다.

      그린, 글자를 배우고 싶지 않니?”

      뜻밖의 말에 연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뭐가 그리 우습다고 아셰라드가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연두는 처음으로 그녀가 열여덟 소녀 같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 소녀다움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말이다. 아셰라드는 이내 얼굴 표정을 갈무리하고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저택의 고용인들이 아가씨란 저래야 한다고 찬사를 바쳐 마지않는 그런 미소였다.

      서재 청소를 시키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오래 붙어 있었지 않니. 글자에 관심이 있는 것 아니니? 네가 이 저택에서 쫓겨날 위험을 감수하고 날 돕는데 이런 거라도 해주고 싶어 그런단다. 어떠니? 번거롭고 복잡해서 싫으니?”

      그게 제 몫의 대가인가요? 아가씨께서 주시는?”

      이상한 세상에서 하녀 생활 좀 했다고 배 밖에 나온 강연두 간덩이가 어디로 간 건 아니었다. 연두는 마고처럼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을 먼저 따졌다. 아셰라드가 계속 이 꼴이면 자신이 쫓겨날 확률은 점점 더 높아진다. 그때 또 이민족 계집이라 차별을 당하며 굶고 다니지 않으려면 글이라도 알아야 했다. 그렇다고 아셰라드가 흔드는 미끼를 덥석 물기엔 어딘지 꺼림칙했다.

      아셰라드는 연두가 바로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거리를 떠돌던 것을 거둬 먹이고 돌보았지만 쉬이 길들여지지 않는 걸 이미 경험한 바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어떤 앞날도 약속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녀는 장담할 수 없는 약속 대신 선의를 의심받아 상처받은 소녀의 표정을 지었다. 어깨가 처지고 눈꼬리가 조금 내려간 것만으로도 한없이 가련한 분위기가 났다.

      대가라니…….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서운할 거야.”

      연두는 제 입가가 단단하게 굳는 걸 느꼈다. 선량하고 가련한 표정을 짓는 아름다운 얼굴가죽 너머의 의도가 지독하게 뚜렷해서 미소 짓기가 어려웠다.

      퍽이나 그렇겠다.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면 내가 아예 못 벗어날 걸 알고 이러는 거겠지. 염병, 알면서도 거절할 수가 없네. 기분 졸라 엿 같고 더러운 게 아주 좋은데.’

      쌍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아셰라드의 의도는 짐작하지 못할 바가 아니었으나, 연두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야 어쨌거나 겉으로는 자비심 넘치는 아가씨께서 천한 하녀에게 분에 넘치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었으니.

      하위 신분에게 자비롭지 못한 이 세계에서 지식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강력한 도구였다.

      ……아가씨께서 가르쳐 주신다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평생의 은혜로 알고 배울게요. 언제부터 가르쳐 주시는 건가요? 제가 준비할 것은 뭐가 있죠?”

      의욕이 아주 만만하구나. 믿음직한걸. 그린, 네 동료들에게 부탁해서 서재에서 책을 꺼내오렴. 뭘 가져올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네 운인 게지. 시간은 매일 새벽과 늦은 밤으로 하자. 너도 그게 좋겠지?”

      그때 말고는 시간이 안 나기야 하지요…….”

      연두는 잠을 얼마나 줄여야 하나 무심결에 헤아렸다가 한숨을 쉬었다. 수험생 시절로 돌아간 것도 아닌데 잠을 아껴가며 공부를 하게 생겼다.

      그럼 아가씨, 저는 이만 가볼게요. 좁고 더러운 방이지만 편히 쉬세요.”

      무례한 태도였지만, 아셰라드는 그저 웃었다. 그녀는 연두와 단둘이 있을 때면 마치 또래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마음이 풀어지곤 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지금도 그랬다. 다른 하녀라면 엄히 꾸짖었을 말을 듣고도 화가 나지 않으니.

      다정한 염려의 말인지 빈정대는 말인지 구분이 어렵구나.”

      그야 당연히 염려해서 하는 말이죠.”

      퍽이나 그렇겠구나. 되었다, 어서 가보렴. 찾고 있을 텐데.”

      아셰라드가 손짓을 한다. 연두는 그 축객령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그녀는 빈말로도 청소를 더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 자그마한 방의 문을 열고 새카만 구덩이 같은 계단을 앞에 두자 어쩐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저 어린애를 이런 방에 이대로 혼자 둬도 될까 몰라.’

      제 코가 석자고 제 입에 넣을 밥이 더 급한 상황이긴 해도, 모든 사람이 그렇게만 살아서야 어떻게 인간을 두고 사회적 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망설이던 연두는 문득 생각난 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장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아셰라드는 연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초라한 침대에 앉아 작은 창문을 열고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높은 다락방, 싸구려 유리도 아닌 나무 창문 너머 바깥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막 초록빛 새순이 돋아나고 긴 겨울에서 깨어난 생명들이 꿈틀대는 봄의 들판.

      괜찮으세요?”

      아차. 말을 뱉어놓고도 제가 놀라서, 연두는 그만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만 하고 말아야 할 걸 괜히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겨우 열여덟 살, 아버지를 잃고도 마음껏 슬퍼하지조차 못하는 소녀가 그저 가여워서, 그 비슷한 나이에 부모님을 잃었던 자신을 투영해 버렸다.

      사고는 한순간이었다. 단란했던 가족은 하룻밤 만에 사라졌고 연두는 채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어른의 민낯을 보았다. 정승 댁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지만 정승이 죽으면 가는 사람 없다더니, 그 속담이 왜 나왔는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됐다고나 할까. 가깝다고 여겼던 친척들은 순식간에 배고픈 승냥이가 되어 아직 순진한 구석이 있던 연두에게서 재산을 훑어갔다. 연두가 스토커를 피해 이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라도 남긴 게 그들의 마지막 양심이었을 것이다.

      의지하던 아버지의 실종에 답지 않게 허둥대다가 계모에게 치이는 아셰라드가 낯설지 않았다. 갑작스레 세상이 조각난 기분일 것이고 머리 위에 있던 지붕의 부재가 뼛속까지 실감 날 것이다. 부모님이 드리우던 그늘이 얼마나 컸는지를 새삼 느꼈을 터다.

      위로 한 자락 건네고 싶지만 하녀 주제에 귀한 아가씨에게 그럴 수도 없어 그동안 쭉 참고 있던 입이 기어이 사고를 쳤다. 이렇게 대놓고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창밖을 바라보는 아셰라드의 어깨가 너무 가냘팠다. 작은 다락방의 벽에 짓눌려 금방이라도 납작해질 것처럼 연약해 마음이 쓰였다.

      괜찮단다.”

      아셰라드는 이번에도 화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꼼짝도 않고 밖을 바라보며 난 괜찮다,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연두는 어쩌면 자신이 괜한 참견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열여덟이면 성인이 되는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얼마나 빨리 어른이 될까. 그녀는 요망한 입을 찰싹찰싹 때리며 자신을 자책했지만,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던 동정심을 끝내 버리지 못해 결국 다시 물었다.

      곧 요 아래 마을에서 봄맞이 축제가 있을 거래요. 이 부근을 지나는 집시들까지 죄다 불러서 크게 놀 거라는데, 아가씨도 가시겠어요? 기분전환이 되실 거예요.”

      재미있게 놀다오렴.”

      , ,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럼 편히 쉬세요.”

      냉큼 따라올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그래도 말은 전했으니 됐겠지. 연두는 애써 마음의 무게를 털어버리고 좁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탁탁탁, 투박한 나무 신발이 돌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셰라드는 연두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창밖의 평화로운 풍경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봄의 향기를 실은 바람이 창문을 넘어 들어와 금빛 머리칼을 희롱했다. 그러나 아직 서늘한 바람을 맞느라 점차 식어가는 뺨은 창백했고 꽉 다물린 입술은 고집스러웠다.

      ……괜찮을 리가…… 있나.”

      아주 작은 속삭임은 바람을 타고 포르르 날아가 사라졌다. 아셰라드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 드넓은 저택에 있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살아온 사람이 차마 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이 미련한 자존심을, 신분도 처지도 다른 이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 그저 숨을 죽이고 기회를 기다릴 밖에.

      그녀의 빠알간 입술이 우아한 호선을 그렸다. 그건 마고도, 연두도 한 번도 본 일 없는 미소였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연두가 천천히 이 세계의 철자와 문법에 익숙해지는 동안에도 아셰라드의 사정은 그리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빠지기만 하고 있었다.

      아셰라드가 하녀 방 위의 다락방을 쓴다는 걸 알고도 어째 가만히 있다 싶던 백작부인은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진짜로 하녀 취급하기 시작했다. 초라할망정 격식은 갖추고 있던 드레스는 죄다 불태워졌고 대신 낡은 옷가지 몇 벌과 구색만 갖춘 하녀복이 주어졌다.

       

      일을 하지 않으면 식사를 주지 않겠다.”

       

      이왕 하녀 취급을 할 거면 월급이라도 주면 좋았을 것을, 솜씨가 형편없다며 그마저도 없었다.

      바느질, 요리, 청소…… 점점 힘든 곳으로 밀려 나던 아셰라드가 마지막으로 보내진 곳은 바로 빨래터였다. 빨래는 고된 일이었다. 하녀들 대부분이 첫손으로 꼽으며 싫어하는 일이 바로 빨래였으니 말해 무얼까.

      아셰라드가 두꺼운 침대 시트를 한 아름 안고 빨래터에 나타나자 먼저 와 있던 하녀들의 낯빛이 순식간에 나빠졌다. 안 그래도 봄이라 빨래거리가 넘쳐나는데 아셰라드가 빨래 담당이 되자마자 일거리가 두 배나 늘었다.

      후다닥 달려간 하녀 한 명이 아셰라드에게서 시트를 빼앗아 들었다. 일전에 힘이 부족한 아셰라드가 넘어지면서 빨래를 더럽혔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비록 그렇다하더라도 지극히 무례한 태도였는데 아무도 지적을 않는다.

      이리 주세요. 떨어뜨리지 마시고.”

      미안하구나.”

      미안하시면 저기 가셔서 빨래 좀 밟아주세요.”

      역시 하녀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나무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텐데도, 아셰라드는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긴 치마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 맨발로 빨래를 밟으며 때를 뺐다. 남들 눈앞에 맨발을 드러내지 않는 게 상류계급 여성의 덕목 중 하나라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참을성이었다.

      아가씨! 나오세요!”

      뒤늦게 상황을 알고 달려온 마고가 아셰라드를 빨래통에서 끌어냈다. 직접 챙겨온 수건으로 그녀의 발을 손수 닦아내고 다른 하녀들에게 악을 쓴다.

      왜 아가씨께 이런 일을 시켜? 본래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잖아!”

      마님께서 시키신 일인데 우리더러 뭐 어쩌라고.”

      맞아. 우리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나?”

      저마다 마님 탓을 하며 숨는 꼴이 마고의 화를 돋웠다. 마고는 당장에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처럼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웃기는 소리 말구! 너희가 할 때도 서넛은 같이 했던 빨래 밟기를 아가씨 혼자 시켜놓고 그런 식으로 변명하지 마! 아가씨가 착하셔서 암말 안 하신다고 막 떠넘기지 말란 말야! 신입이 들어와도 이따위로 하진 않았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마고, 난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 내 눈 피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보라고!”

      마고가 본격적으로 따지기 시작하자 빨래터의 하녀들은 저마다 눈을 피하며 딴짓하기에 바빴다. 결국 그날 아셰라드는 빨래 밟기에서 벗어나 빨래 나르는 일만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고가 아셰라드를 감싸는 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아셰라드에게 힘든 일을 시킬 때마다 마고가 나타나 훼방을 놓으니 나중엔 마고에게 중간에 빠질 수 없는 일들을 맡겨 아예 오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연두가 나서보았지만 그녀는 하녀들 사이에서 입지가 약해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가 않았다.

      힘겨운 날들이 이어지는 동안 아셰라드의 색 고운 금발은 헝클어졌고 흰 손은 온통 빨갛게 부르텄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느라 여기저기 검댕이 묻은 얼굴과 옷을 보자면 누가 귀족가의 귀한 아가씨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겉모습이 초라해지자 주변의 대우도 바뀌었다. 저속한 농지거리와 비아냥거림이 마치 그림자처럼 아셰라드의 뒤를 따라다녔다. 젊은 남자 하인들은 서넛만 모이면 시시덕대며 아셰라드에 대한 말들을 나눴다.

      역시 귀족 출신은 걸음걸이부터 달라. 소리가 없잖아, 소리가.”

      침대에서도 소리 없는 거 아냐? , 그럼 할 맛 떨어지는데.”

      이 새끼, 예리한데?”

      설마, ? 암만 출신이 좋아봐야 계집인데 그럴 리 있겠어? 내 허리 놀림 좀 봐봐! 아주 죽는다고 자지러질걸!”

      미친놈. 어디 아홉 살 애새끼만 한 걸 들이대? 남자라면 나 정도 크기는 되어야…… . 다들 입 다물어. 보고 있다.”

      보면 뭐 어쩔 건데. 자르기라도 한대? 무슨 재주로? 자를 수 있대도 어딜 자르려나? 머리? 아랫도리? , 설마 아랫도린 아니겠지? 야아, 저 봐, 저 봐. 그냥 가네. 치마라도 한 번 뒤집어주지. 싱겁게.”

      이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대화들이었다. 곱게 자란 아가씨로서는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을 테다. 익숙하지 않은 육체적 노동과 과중한 스트레스가 아셰라드를 점점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연두는 아셰라드와의 수업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다 포기하고 그냥 문맹으로 사는 건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아셰라드는 훌륭하면서도 교활한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연두가 기본 철자와 문법을 모두 떼고 어느 정도 책을 읽을 만한 수준이 되자 또 다른 미끼를 내놓았다. 파르만 백작령이 속해 있는 이 나라, 반시 왕국의 역사, 외교, 문화, 정치, 종교…….

      반시 왕국은 연두가 알고 있는 어떤 나라와도 달랐다. 어떤 세계도, 시대도, 이곳과는 맞지 않았다. 일례로 설탕과 소금이 있었다. 소금 귀한 거야 이런 원시적인 유통구조에서야 당연한 일일 테지만 설탕은 어쩜 그렇게 흔한지. 종교는 또 어떻고? 사람들은 유일신의 신자로서 교회에 다니면서도 마녀와 요정, 마법에 대해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가졌다. 이곳의 사람들이 치러내는 명절과 스며 있는 풍습 역시 그 유래가 낯설었다.

      제엔자앙…….’

      이 정도까지 오니, 연두는 아셰라드의 수업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죽일 놈의 호기심이 그녀의 등을 쿡쿡 찔러 다락방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게 만들었다. 강의로 시작해 토론으로 끝나는 수업은 마치 마약처럼 연두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한계가 없는 호기심에도 우선순위는 있었다. 여느 때보다 유독 화려한 봄맞이 축제 때문에 저택과 바깥이 온통 떠들썩한 밤, 몰래 들고 나온 책으로 수업을 받던 연두는 기어이 분통을 터뜨렸다.

      아가씨! 책으로만 백날 수업하지 말고요! 제발 좀 나가게 해주세요, ? 현장학습 하자고요, 현장학습! 봄맞이 축제의 유래니, 풍습이니, 백날 책 붙들고 늘어져 봐야 한 번 보는 것만 못할 게 빤하잖아요.”

      가고 싶으면 가려무나. 내가 언제 못 나가게 막은 일 있었니?”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수업 다신 안 해준다면서요!”

      그때 말했던 철자 수업은 이미 끝났잖니. 난 네가 축제에는 흥미가 없는 줄 알았지.”

      책장을 넘기는 아셰라드의 태도는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워서, 연두는 순간적으로 울컥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삼키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참자, 쟤는 나보다 열 살은 더 어린아이다. 참자!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연두의 낯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책을 덮어버린 아셰라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그린 네 나이가 올해 열아홉이니 딱 결혼적령기였구나. 부모님이 안 계시니 천생 연애결혼밖에 남는 게 없겠어. 미안하다, 네가 절박한 걸 내가 알아주지 못해서. 오늘은 마침 밤새 모닥불 앞에서 남녀가 어울려 춤을 추는 날인데, 이때 혼인해서 부부가 되는 커플이 많단다. 때를 놓치면 괜찮은 놈들은 다 다른 계집아이들이 채가고 없을 테니 서두르렴.”

      열아홉은 무슨. 아셰라드를 처음 만났을 때가 스물아홉이었고 열여덟이라고 사기를 쳤으니, 이제 연두의 나이는 올해 서른이었다. 동양과 서양의 피가 함께 섞인 얼굴이 이 세계에서는 대단히 어린 나이로 보인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속이지는 말걸 그랬다. 그녀는 버릇대로 입술 껍질을 잡아 뜯었다.

      조금 덜 속일걸. 너무 갔어.’

      물론, 이 세계에 익숙하지 못해 뭐든 실수투성이였던 걸 무난히 넘기려면 한 살이라도 어리게 취급받는 게 나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이 스물아홉의 노처녀라고-이 세계에서는 스물다섯을 지나면 구제불능의 노처녀였다- 솔직히 말했으면 구박이야 좀 당했을망정 남자 사냥을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철없는 계집애 취급은 안 당했을 테다. 분명히 말하건대, 연두는 독신주의자였다.

      아가씨, 실은 제 나이가요…….”

      그래, 안단다. 한두 살 정도 더 부풀려 말한 거였지? 어린 아이들은 일찍 나이 먹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 어쨌거나 이제 와서 실은 더 어렸다고 해봐야 소용없어. 어차피 결혼할 남자를 물색해야 할 때가 되긴 했잖니. 얼른 나가보래도?”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린 너는 영리하니까 그런 실수를 하진 않겠지 싶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당부를 좀 하마. 마을에는 네가 의지할 곳 없는 아가씨라는 걸 이용해서 어떻게 손만 대고 책임은 안 지려는 못된 놈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남자를 고를 땐 조심하도록 하렴. 얼굴만 멀끔하고 속은 빈껍데기인 놈은 세상에 아주 많단다. 그리고…….”

      괜찮아요, 아가씨. 충분히 들었어요. 다녀올게요.”

      결국 연두는 해명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빠르게 나오는 편을 택하고 말았다. 열 살도 더 어린 아이에게 남자 보는 눈 운운하는 설교를 듣는 건 정말로 괴로웠다. 조금만 더 듣고 있다간 나이 어린 상사를 상대하는 중이라는 자기 최면도 때려치우고 벌컥 화를 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온 경위야 어찌되었든 봄맞이 축제는 제법 성대했다. 마을의 광장 곳곳에선 모닥불이 타올랐고, 축제날이라 특별히 마을 안쪽에 들어오길 허락받은 집시 무리가 흥겨운 음악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불콰하게 취한 얼굴을 하고는 엉망진창인 스텝을 밟아가며 춤을 췄다.

      연두는 광장 여기저기에 쌓인 음식들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겨울을 앞두고 벌어지는 카니발도 아닌데 이만큼이나 음식을 풀다니, 성대한 축제를 열겠다던 백작부인의 말이 빈 말은 아니었던 게다.

      엄청 풀었네. 무리 좀 했겠는데.”

      백작님은 실종되고 후계자인 아가씨는 거동도 못할 정도로 아프다는 소문 때문에 흉흉해진 분위기를 달래기 위한 고육책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겉으로는 모든 게 풍족하고 정상적이며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보라, 평생을 땅을 일구며 살아온 어리석은 농민들이 술 창고를 열어준 마님을 위해 감사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이런 나날이 몇 년만 더 이어진다면, 이들은 가여운 아셰라드를 까맣게 잊고 말리라.

      연두는 어쩐지 씁쓸해지는 입맛을 다시며 바닥에 나뒹구는 술병을 주워 올렸다. 가볍게 흔들어보자 병 아래에 조금 남아 있던 와인이 찰랑찰랑 소리를 냈다. 목이 말랐다.

      연두가 병나발이라도 불 것처럼 병을 거꾸로 들자, 멀찍이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청년들 중 한 명이 다가와 은근슬쩍 들러붙었다. 그는 아직 따지 않은 병을 쥐고 짐짓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연두의 옆을 차지하려 눈치를 봤다.

      그린, 술 마시게?”

      ? 안 돼?”

      안 되긴. 그나저나 그거 너무 적어서 부족할걸. , 이거 받아.”

      청년이 불쑥 술병을 내밀었다. 새어나오는 향을 맡는 것만으로 취할 것 같은 독주였다. 연두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술을 좋아하는 미녀인 그녀가 이런 술 권유를 얼마나 많이 받아보았겠나. 세기의 미남이 권해도 수락을 고민할 상황인데 심지어 눈앞의 남자는 입 냄새가 고약한 못난이였다.

      그런 독주는 너 혼자 실컷 처먹어.”

      연두는 근거도 없이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의 정강이를 시원하게 걷어차고 돌아섰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둘을 흘끔대던 사람들이 아픈 정강이를 붙들고 펄쩍대는 청년을 향해 와하하 웃어댔다.

      그린이 얼마나 철벽인데 그런 술 한 병으로 꼬시려들어?”

      이 술이 뭐 어때서! 우리 아버지는 없어서 못 마시는 술인데! 비싼 거야!”

      저 새끼 차일 만한 소릴 하고 있네. , 그린이 너네 아버지냐?”

      아냐, 저놈은 술이 문제가 아니라 얼굴이 문제야. 그 얼굴로 그린을 꼬시려면 그 비싼 술보다 세 배는 더 값나가는 선물을 들고 가야지!”

      연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렇게나 변했다. 소름 끼친다던 이민족의 얼굴은 매력적인 개성이 됐고, 신원을 보증할 친척이 없어 불안하다던 사람들은 어쨌든 약혼자도, 연인도 없으니 그거면 됐지 않냐고 했다. 연두가 백작저에서 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녀를 받아들였다.

      연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건 마을 청년들뿐만 아니라 마을의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두를 향한 그녀들의 눈빛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마을 청년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것에 대한 질투, 백작저에서 일한다는 것에 대한 동경, 그동안 틈틈이 쌓인 친분, 등등.

      그중에서도 수아나의 시선은 유독 집요했다. 그녀는 연두가 오기 전까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여왕님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연두가 오자마자 주변의 남자들을 죄 뿌리치고 연두에게 다가와 곁을 차지했다.

      못 올 줄 알았더니?”

      꼭 오라던 게 누군데? 그나저나 넌 내가 안 와도 재밌었겠다. 하도 잘 놀고 있어서 날 까먹은 줄 알았지.”

      연두의 투덜거림에 수아나가 콧잔등에 주름까지 잡으며 웃었다. 수아나는 마을 제일의 인기인이었다. 마을 내에서는 제일가는 미인인 데다 유복한 방앗간 주인 하슨의 하나뿐인 딸이니, 인기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건 그 미모와 인기에 비례할 정도로 가벼운 입 덕분에 여기저기에 적이 많다는 것 정도랄까.

      어쨌건 수아나는 연두를 꽤 좋아했다. 그녀의 이국적인 미모도, 욕을 달고 사는 입버릇도, 모두 마음에 든다고 했다. 단 하나, 연두가 남자들의 시선을 죄다 빼앗아갈 때만 빼고.

      수아나가 연두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았다.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한 연두가 잔뜩 골이 난 표정을 지었지만, 수아나는 꿋꿋했다. 연두를 한심해하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았다.

      뭐 하는 짓이야? 컵도 없이 천박하게.”

      컵에 따라 먹을 만큼이 안 되는 걸 어떡해. 그나저나, 수아나는 오늘도 예쁘네?”

      예쁘면 뭐 해. 네가 나타나자마자 사내새끼들 눈길이 죄다 너한테로 가는데.”

      하하, 난 그런 눈길 하나도 안 반가운데. 알잖아.”

      연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또 못마땅해, 수아나는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알지만 짜증나는 걸 어쩌란 말이야? 그리고 넌 곧 결혼해야 할 애가 사내놈이 싫다고 그렇게 빼서 어떡할래? 그러다 혼기를 놓치고 순식간에 꼬부랑 할멈이 될걸.”

      웃어, 수아나. 짜증낸다고 그렇게 찌푸리다간 예쁜 얼굴에 주름 생겨.”

      무슨 말을 하든, 연두는 수아나가 그저 귀여웠다. 그래, 문제는 나이 차이였다. 일단 연하의 남자에게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연두는 자신을 경계하며 빽빽대는 한참 어린 마을 처녀들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반말을 듣는 거야 나이를 속인 죗값이려니 하면 그만이었다. 태평한 대답을 들은 수아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벌써 한 병 먹고 나왔니? 너는 오늘도 제정신이 아니구나?”

      네 기준에서 내가 제정신인 날이 있긴 했고? 앉아, 여기 자리 있어.”

      수아나는 연두가 권한 자리에 앉는 대신 어느 한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젊은 남자들 몇이 모여서 낄낄대고 있었다.

      혼자 술 처마실 정신이 있으면 저기 가서 남자나 골라. 하루하루 나이만 먹으면서 남자 하나 못 낚아서 등신같이 굴지 말고 아직 젊고 예쁠 때 얼른 결혼해서 썩 꺼져 버려.”

      예쁜 입술에서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말이 나왔다. 뭔가 되게 난폭한 말을 들었는데 이게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구분이 안 간다. 연두가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수아나는 갑갑한 가슴을 치며 말을 이었다.

      네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나 본데, 여기서 연애결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 사고 쳐서 임신하는 거. 넌 부모님도 안 계시고, 그렇다고 부모님 역할을 해줄 오라버니가 있는 것도 아니니 결혼하려면 그 길밖에 더 있어? 저기 서 있는 놈들, 내가 나름 솎아낸 놈들이니 대충 하나 골라. 장소가 없으면 우리 방앗간 빌려줄게. 거기 시끄럽고 좋아.”

      ……결혼 전에 임신 같은 거 했다간 맞아 죽는 거 아니었어?”

      임신하고 결혼해서 낳나, 결혼하고 임신해서 낳나 뭐가 달라? 임신하고도 결혼을 못하는 게 문제인 거지.”

      연두는 문득 생각했다. 혹시 얘도 나처럼 드림랜드에서 넘어온 애는 아닐까. 여자의 발을 두고 지나치게 에로틱한 부위라며 바닥까지 끌리는 치마를 입기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뭐 이런 개방적인 계집애가 다 있나. 이런 말을 이렇게 개방된 곳에서 입에 담아도 되는 걸까.

      연두의 침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수아나가 눈을 모로 떴다.

      , 설마 임신까지 해놓고도 결혼 약속을 못 받을 만큼 병신인 건 아니지?”

      ……생각이 어떻게 그리로 튀니…….”

      그래, 설마 그렇게까지 병신은 아니겠지. 그러니까 얼른 남자를 고르란 말이야. 너 좋다는 남자 많잖아.”

      , 그러는 넌? 너야말로 젊고 예뻐서 인기 많을 때 얼른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연두의 반격은 수아나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끝이 갈라진 턱을 치켜들며 오만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약간 푸석한 갈색 머리카락이 긴 목을 따라 출렁거렸다. 햇살 아래에서 금실처럼 반짝이는 갈색 머리카락은 그녀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쟤들은 나한테 대기엔 급이 좀 떨어지지. 내 아버지는 방앗간을 가진 유복한 자유민이고, 낳은 자식은 많았어도 살아남은 자식은 나 하나라고. 난 결혼할 때 방앗간과 기름진 땅을 가지고 갈 수 있어. 그러니, 나와 결혼할 남자는 금으로 망토를 짜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면 안 돼.”

      너 그러다 독신으로 늙는다. 꿈도 적당히 꿔야지.”

      악담하지 마. 축제에 놀러온 요정이 듣고 진짜라고 오해하면 어쩌려고 그래?”

      요정을 믿어?”

      아유,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린, 너 몇 살? 세 살?”

      닥쳐.”

      수아나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연두는 그런 수아나의 손에서 아까 빼앗긴 술병을 되찾았다. 이번엔 수아나도 간섭하지 않았기에 겨우 병나발을 불었는데 몇 방울 남은 게 없었다. 분명 처음 집었을 땐 반 이상 차 있는 것처럼 묵직했었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하여간, 이 세계의 유리는 쓸데없이 무겁고 질이 나빴다.

      그녀들이 앉아 있는 곳을 향해 여러 청년들이 시선을 주었지만 서로 견제하느라 바빠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두는 꽤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술과 불에 익어 붉은 얼굴들과 펄럭거리는 치맛자락들, 흥겨운 음악들 너머에서 연두를 바라보는 남자. 어둔 밤에 뜬 보름달처럼 노란 눈을 가진 잘생긴 집시 청년. 네 개의 공을 현란하게 던지며 재주를 부리던 집시 청년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남자다우면서 유연한 이목구비가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왜지? 낯익어.’

      연두는 홀린 것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한 번도 본 일 없을 얼굴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낯익었다. 하지만 아몬드형의 아름다운 눈도, 곧게 뻗은 예쁜 코도, 틴트라도 바른 것처럼 붉은 입술도…… 아무리 바라보아도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체적인 인상을 보는 순간에는 낯익다는 느낌만 나는 게다.

      얼굴을 뚫어버릴 듯 쳐다보는 연두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건만, 집시 청년은 더더욱 입꼬리를 올릴 뿐 시선을 피하려 하질 않았다.

      둘이 나누는 시선을 알아챈 수아나가 연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남자가 마음에 들어?”

      아니, 난 그냥…… 낯이 익어서. 어디서 만났었나?”

      핑계 대기는. 그냥 마음에 들면 든다고 하면 되지 뭘 그렇게 엉덩이를 빼니? 그나저나 꽤 미남이네. , 생각보다 얼굴을 밝히는구나? 그래도 집시는 안 돼. 저놈들은 여자들을 홀려서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고는 책임지는 것 하나 없이 훌쩍 떠나 버린다고. , 정력은 좋다고들 하더라. 하룻밤 즐기기만 하겠다면 괜찮은 선택이지만.”

      너한테 그런 말 듣는 거 정말 충격적이다…….”

      어차피 다들 술에 잡아먹힌 지 오래인걸. 시끄럽기도 하고. 그리고 그린 너는 나 같은 수다쟁이가 아니잖아? 아무튼 마음에 들었으면 가봐. 방앗간 빌려줄 수 있다는 거 진짜야.”

      수다쟁이의 제안 따위는 단박에 거절했어야 했지만, 연두는 그러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시선을 놓치지 않고 공을 던지고 있던 집시 청년의 손목에서 낯익은 물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땡땡이 무늬의 고무줄 머리끈.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연두가 인형의 집에 들어갈 때 광대에게 마수걸이 요금으로 지불했던 그 머리끈이 틀림없었다.

      그래. 그 시끄럽고 좋다는 방앗간, 좀 빌리자.”

      ! 그린? , 진짜로 가게? , ! 집시라고! 집시!”

      저가 부추겨 놓고는 더 놀란 수아나가 기겁을 했지만, 지금 연두는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어 집시 청년을 향해 헤엄쳤다.

      집시 청년은 난데없이 나타난 연두에게 손목을 잡혀 끌려가는 와중에도 크게 반항하지 않았고, 그건 연두에게 몹시 다행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금 목까지 차오른 흥분 때문에 숨 쉬기도 힘든 지경이었으니까.

      하슨 씨의 방앗간은 마을 외곽에 있었다. 몸뚱이가 희고 키가 큰 나무들을 등에 지고 선 작은 방앗간은 쥐죽은 듯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방앗간 앞을 흐르는 개울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시끄럽고 좋다더니, 수아나의 말은 다 개뻥이었다.

      ! 연두는 잠겨 있지 않은 방앗간 문을 열어젖히고 집시 청년을 밀어 넣었다. 연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청년이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그나마 바닥에 지푸라기가 두툼하게 깔려 있어 큰 소리는 안 났다. 연두는 청년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냅다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그때 그 광대 새끼 맞지?”

      아아…….”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내가 언제 이런 데…… 이런 데 보내달라고 했어? 난 그냥 인형 구경이나 좀 하겠다는 거였는데. 왜 이런 곳에 와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건데! 이게 무슨 놀이공원이야? 이런 게 드림랜드야?”

      낯선 세계에서 적응하며 쌓여 있던 설움이 일시에 폭발했다. 애써 눌러두었던 외로움과 억울함이 새삼 사무쳤다. 멱살을 잡은 손등에 파르스름한 핏줄이 돋았다.

      드림랜드라는 거, 대체 뭐냐고!”

      하지만 연두가 아무리 기를 쓰고 올라타 눌러대도 결국엔 여자 힘이었다. 집시 청년은 가벼운 손짓만으로 연두의 손을 털어버리고 옷자락에 생긴 주름을 두드려 폈다. 그리곤 손목에 끼고 있던 머리끈을 빼서 길게 늘어진 머리칼을 올려 묶었다.

      나는 뭐 땅 파서 장사하나요? 그걸 가르쳐 주게?”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말을 막 하네?”

      광대가 얄미운 어조로 삐죽대며 연두의 성질을 돋웠다. 울컥 화가 난 연두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는데도 그는 그저 마냥 여유롭기만 했다.

      입이 뚫렸으니까 말을 하지, 막혔으면 어떻게 말을 하나요. 연두 씨, 드림랜드가 뭐 하는 곳인지 알아내는 게 중요해요, 돌아가는 게 중요해요?”

      다시 멱살을 잡으려고 허공에 헛손질을 하던 연두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그렇다. 이제 와서 드림랜드가 대체 뭐 하는 곳인지 알아내는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거의 포기하고 있던 시점에 내려온 동아줄이니 일단 움켜쥐고 봐야 하지 않겠나. 설령 그게 썩은 동아줄이라고 해도 연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것뿐이었다. 이 세계는 정말 지긋지긋했다. 연두가 까드득, 이 가는 소리를 냈다.

      나라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머리끈 하나로는 어림도 없는 서비스인데 이런 고생을 하게 만들다니, 연두 씨도 어지간해요.”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아니, 됐다. 가방도 떨어뜨리고 왔는데 뻔하지. 이 빌어먹을 새끼야, 어차피 뚫린 입이라 말을 할 거면 똑바로 해. 이게 서비스야? 이게 서비스냐고! 이게 서비스면 세상에 서비스가 다 얼어 죽었게?”

      쓸데없이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이나 마저 들어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당연히 돌아가고 싶지! ……설마, 나 데리러 온 거 아니었어?”

      뭐어……. 데리러 온 게 맞긴 한데, 문제가 조금 생겨서 말이죠. 얘기가 기니까, 앉아서 듣는 게 좋을걸요.”

      광대가 히죽 웃었다. 광장에서 재주를 부리고 있을 때는 그나마 좀 사람 같더니, 이렇게 연두와 단둘이 남자 드림랜드에서 만났던 그 섬뜩한 광대 그대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진즉에 뒷걸음질로 도망쳤을 것이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연두는 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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