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간의 짝사랑을 끝낸 것은 그의 잔인한 한마디였다.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어. 네 도움이 필요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하던

그의 얇고 붉은 입술 사이로 가슴을 헤집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 사람은 나한테 영 관심이 없어서.”

“네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너는 잘 알 것 같아서.”

내가 뭘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었다간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연신 머리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유랑비

우아하고 우울한 세상을 유랑하는 유랑비

“내가 오늘, 네 몸을 사랑해 줄 테니까.”

그가 좁고 더러운 골목길에서 내게 한 말. 그게 정말 그런 뜻이 맞을까. 내가 생각하는 그 뜻, 그게 맞는 걸까.

하지만 지난번에 그는 아무것도 내게 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희고 긴 그의 손가락으로 서로의 것을 같이 쥐고 우리는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그건 자위에 가까운 행위였다.

그리고 끝까지는 가지 못했다. 아니, 가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거기 앉든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 위에 앉았다. 뒤집힌 속과, 깨질 듯한 머리……. 그리고 눈앞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앉기만 해도 한결 편했다.

소파에서는 부엌의 그가 정면으로 보였다. 그는 무언가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더니, 싱크대 위에 두 팔을 짚고 섰다.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그는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와,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를 꽉 깨물고 있는지 턱 근육이 움직이는 것은 보였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간다.

위이이잉…….

그 소리마저 없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 상태로 한참을 있었다. 선배가 얼마나 싱크대를 꽉 잡고 있었는지, 그 손의 마디가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땡.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끝나고, 그가 전자레인지 안에서 컵을 꺼내 들고 왔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그 시선은 허공을 맴돌았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야 그는 내 얼굴에 눈동자를 맞췄다.

“마셔.”

“이게…….”

“미네스트로네야, 채소 수프.”

컵을 받으며 그의 손가락 끝과 손이 스쳤다. 그 작은 접촉에도 가슴이 찌르르 달아오른다. 이 정도로도 이렇게 동요하는데, 그와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저는 괜찮은데.”

“괜찮지 않아. 너 오늘 아무것도 안 먹고 맥주만 마셨잖아.”

그가 말을 하다가 말을 끊고 한숨을 쉬었다.

“하아…….”

깊은 한숨이 나를 찌른다.

“내일 후회하지 말고 마셔.”

명령이었다. 어쩔 수 없이 컵을 입에 대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액체가 천천히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며칠 동안 온통 상처만 났던 위 벽을 감싸 안으면서, 울렁거리던 속이 천천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선배는 소파 반대편 벽에 기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스듬히 기댄 그는 처음에는 잘 먹고 있나, 마치 감시하는 눈초리로 나를 훑었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떨어뜨렸다. 답답한지 인상을 쓰며 하얗고 큰 손을 넥타이 매듭에 걸고 흔들었다. 그리고 엄지로 톡, 단추를 끌렀다.

결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태풍이 왔던 날에만 봤던 그의 속살이 드러난다. 단추가 하나, 또 하나 풀리면서 단단한 가슴 근육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봐서는 안 돼.

단추가 세 개쯤 풀렸을 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시선을 컵으로 옮겼다. 하지만 다시 한번 단추가 풀리는 작은 소리가 들리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들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바닥을 바라보며, 피곤한 듯이 재킷을 벗어 툭, 일인용 소파 위에 던지고는 팔짱을 끼었다.

정말…….

비참하다.

수프를 마시다 말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

술 때문일까. 터져 버린 내 웃음소리에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말은 없었지만. 내가 얼마나 변태 같고 저질인지 생각하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을 생각해 봐.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 관심을 보내, 그렇게 하반신이 허전하면 자신이 대신 자겠다고 제안한 상황. 최악으로 비참하고 괴로운 이 상황에, 셔츠 자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맨살을 보고 뻐근한 흥분이 허벅지를 타고 내린다.

“하하……. 하아…….”

어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