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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대학병원의 흉부외과 전문의 심효인에게는 열두 살에 처음 만나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절친한 친구가 있다.
한 명은 한국에서, 한 명은 미국에서 의사가 되기까지, 떨어져 지낸 시간이 그만큼 많음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말해온 친구. 그러던 중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 일하던 진환이 한국, 효인이 있는 대한대학부속병원으로 옮겨오게 된다.
흉부외과 전임의 심효인과 장진환.
같은 꿈과 마음을 공유하고, 서로의 연애사까지 전부 알고 있을 정도로 절친한 이십년지기 친구,
두 사람은 과연 오랜 친구라는 틀을 깨고 마침내 연인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유리심장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대한대학부속병원 흉부외과 전임의, 심효인.
고양이처럼 새침한 외모와 곰처럼 우직한 속내를 지닌 그녀는
삶의 격전지이며 인생사의 전시장인 병원을 사랑했다.
그녀에게 오랜 친구가 돌아왔다.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 흉부외과에서
대한대학부속병원 흉부외과로 전근 온 전임의, 장진환.
그들의 이름은‘ 늘 푸른 나무처럼 변치 않을 친구’였다.
과연 그들은 친구를 넘어 연인이 될 수 있을까?
조례진
출간작
<암브로시아(Ambrosia)>
<나하쉬(Nahash)> 외
심장이란 참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보통 주먹쯤 되는 작은 크기로, 1분에 약 70번 뛰며 하루에만도 엄청난 양의 혈액을 순환시켰다. 인간이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는데, 아무리 힘이 좋은 기계라고 하더라도 수십 년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가끔 탈이 나기도 하지만, 효인에게 있어 심장이란 이미 인체의 기관이라는 정의를 넘어 한 명의 아이 같은 존재였다. 잘 삐치고, 잘 토라지고, 섬세하고 예민하지만 언제나 힘이 넘치고 미래지향적인 그런 아이. 그렇다면 효인의 직업은 유치원 보모인가? 뭐, 일종의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효인은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어깨도 한번 으쓱거려 주고, 지루한 수업을 끝내고 하교 시간을 맞은 여고생처럼 경쾌한 걸음으로.
그때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여자가 왠지 굉장히 즐거워 보이는 그녀를 발견하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심 선생.”
효인은 ‘응?’ 하며 고개를 들었다. 구수한 트로트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고 있던 차라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아, 홍 선생님.”
효인은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정임은 흥겨워 보이는 효인 옆에서 걸어가며 물었다. 그러자 효인은 눈매를 부드럽게 녹이며 웃었다. 그녀는 경단처럼 차지고 흰 피부에 고양이 상의 눈매, 선천적으로 색소가 옅은 연갈색 눈동자를 가졌고, 역시 색소가 옅은 편인 암갈색 머리카락은 가슴까지 찰랑이며 내려왔다. 물론 지금 머리는 일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 가닥으로 질끈 묶고 있었지만, 오밀조밀한 생김새가 꽤 새침해 보였다. 하지만 정임은 꽤 오랫동안 효인을 알아왔기에 그녀가 외모는 고양이처럼 새침해도 속은 곰처럼 우직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일은요.”
척 보기에도 화색이 만연한 얼굴인데 효인은 발뺌했다. 그에 정임은 눈을 흘기며 추궁에 들어갔다.
“에이, 좋은 일 있는 것 같은데? 걸음걸이가 완전히 꽃 따러 가는 봄 처녀야.”
그러자 효인은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더니 이내 실토했다.
“좋은 일이 있긴 있어요.”
어라라? 정임은 의심이 그득한 눈으로 효인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들떠 있는 미소와 열기 어린 빛으로 상기된 눈. 같은 여자이니 만큼 정임은 여자의 이런 변화가 뭘 말하는 건지 모르지 않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효인은 빤한 시선이 부담스러워 주춤 고개를 물리며 반문했다. 그러자 정임은 일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남자일까? 작업이 들어오면 깔깔 웃으며 퇴짜 놓아버리고, 점점 먹어가는 나이가 불쌍해 선 자리 좀 주선해 주려고 하면 아직 할 일이 많다며 정중하게 거절하고, 은근히 쉬워 보이는 듯하면서도 철벽 같은 심 선생을 함락시킨 남자는?
“심 선생, 남자라도 생겼어?”
단도직입적인 공격이었지만 효인은 세상천지에 이토록 생경한 말은 처음 들어본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제가 진짜 나이를 먹긴 먹었나 봐요. 조금만 얼굴에 혈색이 돌면 다 어째 남자 타령을 하는지……. 서른넷 먹은 전문직 여자가 기쁠 일이 남자밖에 없을까 봐요?”
“꼭 연애하는 여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그래.”
“그나저나 홍 선생님은 어디 가는 길이세요?”
효인은 말을 돌렸고, 정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야 뭐, 이제 퇴근하는 길이지.”
혼잡한 도시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대한대학부속병원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병원으로, 제3차 진료기관의 정점에 서 있었다. 발간 노을이 잦아들 때 올려다보자면 건물이라기보다 하늘과 땅에 발을 대고 선 거인처럼 보이는 대한대학부속병원에는 현대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임상학과가 존재했고, 의료, 행정, 위생 등 분야를 통틀어 이곳에서 근무하는 인원은 수천 명에 달했다.
현재 효인은 전임의(펠로우) 1년 차로, 이 병원에 입성한 지도 벌써 육 년째였다. 그전만 해도 병원의 뒤로 웅장하게 펼쳐진 캠퍼스에서 의학 서적을 끼고 돌아다니는 애송이 의대생이었는데, 벌써 서른네 살이라니 시간이란 정말 쏜살같았다.
“여하간 말 돌리지 말고 속 시원히 불어봐.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거야?”
대한대학부속병원 가정의학과의 조교수인 정임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는지 계속 따라오며 효인을 다그쳤다. 전임의인 효인에게도 조교수는 비록 임상과가 다르더라도 상사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
“……지 않으실걸요.”
복도를 걸어가며 효인이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 치프 레지(레지던트) 납셨네.”
효인은 저 나름대로의 반가움을 표해 보이며 웃었다. 두 여자 뒤에는 굉장히 차분해 보이는, 이십대 후반쯤 되는 남자가 의사 가운을 입고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 거라니 무슨 말이야?”
효인이 소속된 흉부외과의 치프 레지던트인 건하가 묵례하자, 정임은 그에게 물었다.
“오늘 오전에 과장님 호출을 받아 다녀오신 후로는 계속 이 상태시거든요.”
“계속 이 상태라는 건…….”
“OR(Operating room, 수술실)에서도 계속 콧노래를 부르셔서 다들 공포에 질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임은 역시 의심스럽다는 듯이 다시 효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효인은 괜히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건하가 말했다.
“대체 과장님께 무슨 소식을 들으셔서 그러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효인은 난색을 표하며 한사코 바른 대로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자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심 선생, 어서 이실직고…….”
삐― 삐― 삐―
정임이 장난기 어린 협박조로 말하려는 찰나, 효인의 허리에 달린 호출기가 울기 시작했다. 그에 효인은 살았다는 듯 얼른 호출기를 내려다보았다.
“에헤이, 컨설트 들어왔네요. 그럼 나중에 봬요!”
효인은 두 사람이 잡을 새도 없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정임은 거의 나는 것처럼 사라지는 그녀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나중에 봐!”
대한대학부속병원 흉부외과 전임의, 심효인, 서른네 살. 그녀는 오늘도 그녀를 기다리며 징징거리고 있을 아이를 달래기 위해 힘차게 달렸다. 과장이 전한 소식에 주체할 수 없이 기뻐지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먼저였다.
“선생님!”
급하게 걸어가던 간호사 하나가 바닥에 신발 밑창을 마찰시키며 멈춰 서더니, 지나가는 효인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미 가운을 벗고 퇴근길에 오른 효인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나 퇴근이야.”
“아니, 그게 오더(Order, 처방 지시)가…….”
“오더를 왜 나한테 물어?”
“아, 그럼…….”
낭패 어린 기색이 역력한 간호사를 보니 연차 간호사가 아니라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인 모양이었다. 오더는 담당 주치의인 레지던트에게 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 보니.
퇴근길에 오른 효인은 마음이 급해졌지만, 이리저리 굴려지느라 거의 봉두난발을 하고 울상 짓는 어린 간호사를 보니 안면 몰수하고 가기도 뭐 했다. 그래서 맞은편을 가리키고 말했다.
“저기 레지던트 있지? 저쪽에 가서 물어.”
“아, 감사합니다!”
어린 간호사는 레지던트를 놓칠까 싶어 얼른 달려갔다. 그제야 효인도 얼른 정문을 향해 걸음을 움직였다. 퇴근 5분 전이라고 해도 응급수술에 걸리면 다섯 시간이고 여덟 시간이고 잡혀 있어야 하는 외과의 특성상, 누가 잡을까 겁나 아닌 척해도 저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평소라면 퇴근 1분 전이라도 기꺼이 수술실에서 메스를 잡겠지만, 오늘 그녀는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오늘만큼은 무엇도 그녀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갑자기 환자가 그녀 앞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지 않는 한.
그런데 고지가 얼마나 남았을까.
“선생님!”
아니나 다를까, 레지던트 하나가 효인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효인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고 항복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 지금 가운 안 입고 있어.”
“그게…….”
“그게고 자시고 난 지금 절대 걸음을 멈출 수 없으니 알아서 하시게나.”
“으……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레지던트는 빠르게 포기하고 다른 쪽으로 달려갔다. 덕분에 효인은 별다른 방해 없이 병동 1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간호사 스테이션을 지나쳐 갈 때였다.
“선생님, 퇴근하세요?”
진료 기록을 확인하고 있던 간호사가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간호사가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어머, 선생님 오늘 데이트 가시나 보다.”
“데이트는 무슨.”
단박에 부정하긴 했지만 간호사들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왜 퇴근하는데 때 빼고 광내셨어요?”
“여자의 기본이랄까?”
“에이, 안 믿어요!”
의사, 특히 전임의와 간호사 사이에 있는 간격은 때로 거대한 협곡보다 크고 넓은 것이었지만, 간호사들은 하나같이 친근하게 말을 걸었고, 효인도 전혀 불쾌해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받아주었다.
“여하간 다들 수고!”
드디어 효인은 기쁨에 차 병원 정문을 나섰다.
‘성공……!’
생각하는데, 갑자기 가방 속에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하이힐을 신은 효인의 발이 멈칫했다. 효인은 한숨을 쉬고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았다.
Rrrr…… Rrrr…….
계속해서 울리는 벨소리를 무시할 수 없어, 효인은 전화를 받았다.
“네. 심효인입니다.”
[선생님, 잠깐 ER(응급실)에 와주실 수 있으세요? Hx 있는 환자가 들어왔는데 이미 어레스트(Arrest, 심장마비)가 왔고 반응이…….]
효인은 병원을 돌아보았다. 저녁 공기 속에 모든 창문에서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병원 건물은 백 개의 눈을 모두 부릅뜬,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거인 아르고스 같았다.
“알았어. 금방 갈게.”
효인은 걸음을 돌려서 응급실로 가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대기음이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냐?]
효인은 낭패감이 짙은 웃음을 지었다.
“실패했어요, 탈출.”
상대는 쯧쯧 혀를 내차긴 했지만 별로 놀라는 것 같진 않았다. 역시 예상한 듯.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은 다시 돌아오는 효인을 보고 어련히 탈출에 실패했다는 걸 알고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효인은 간호사들에게 말도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젓고 스테이션을 지나갔다. 그러면서 전화 상대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먼저 데리고 식당에 가 있으실래요?”
[올 수 있겠어?]
“노력해 볼게요. 수술만 잡히지 않으면 저녁 식사 끝나기 전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네, 알겠어요. 그럼 먹고 계세요.”
효인은 웃으며 말하고 덧붙였다.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어디 이해 못 할 녀석이냐.]
상대도 웃으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깐 이것 좀 맡아줄래요?”
효인은 응급실 간호사 스테이션에 코트와 안에 입은 정장 상의, 핸드백을 맡기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웅성웅성, 들썩들썩, 북적북적. 응급실은 온갖 어수선한 소리로 포화되어 있었다. 생기가 넘치다 못해 폭풍이 몰아치는 현장에 다들 뛰다 못해 날아다니고, 조금만 미적거리고 있어도 ‘당장 움직여!’ 하고 혼찌검이 날 것 같은 토네이도의 한중간이었다.
효인은 한쪽에서 별로 위급해 보이지 않는 타박상 환자를 처치하고 있는 레지던트에게 다가가 말했다.
“가운 벗어봐.”
“네?”
레지던트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지만 전임의의 말에 순순히 가운을 벗어 건네주었다.
“잠깐 빌릴게.”
효인은 블라우스 위에 가운을 입고 그녀에게 이쪽이라는 듯 번쩍 손을 드는 간호사가 서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아, 선생님!”
간호사는 반색했다.
결국 오늘까지도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지만, 이게 전임의 1년 차 효인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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