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너…… 그렇게 생겨서 베타야?”

드물게 다섯 살의 나이에 이르게 우성 알파로 발현한 제이.

집안의 과도한 보호 속에서 생활하던 도중 유모를 잃고

유모의 혈육을 집에 데려오면서 제 또래의 남자아이,

열 살 현우를 처음 만난다.

무심한 듯하지만 제 감수성도 외로움도 이해해 주는

현우에게 제이는 차차 의지하게 된다.

서로의 세계엔 오롯이 둘밖에 없다고 굳게 믿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둘은 겨울, 갑작스럽게 헤어지게 되고.

스무 살, 스물다섯 살의 봄, 대학교에서 재회하는데.

2권

“현우야. 너…… 베타인데 왜 뒤가 젖어.”

제이는 한시도 현우를 잊어 본 적이 없는 자신과 다르게

현우가 저를 알아보지 못하자 심술과 애정이 동시에 피어난다.

현우는 그런 제이의 응석을 익숙하게 받아 주고픈 마음과

제이와 자신의 사회적, 신분적인 격차에 갈등하며

그를 피하려 하지만, 제이의 직진에 쉽지만은 않은데.

한편 베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오메가의 전유물인

사격의 피험자로서 학교에 다니던 현우는 점차로

우성 알파 제이와 마음이 맞아가면서 몸의 변화가 일어난다.

꽃글

1권

집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어른들뿐이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나 역시 수준이 맞지 않는다면서 나를 놀이상대로 껴 주지 않았다. 당시 내가 주기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바깥사람들이란 가정교사가 전부였는데, 권위주의적인 그 알파들은 누나의 어릴 적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새로운 점이라곤 전혀 없는 얼굴들 앞에서 나는 매사 시큰둥했다.

다섯 살이었던 나는 원래라면 친목을 목적으로 수준이 비슷한 상위 계층 자제끼리 모여 교육을 받아야 했으나, 앞서 말한 적이 있다시피 이르게 발현해 외출이 금지된 상태였다. 세상에 딱 하나뿐인 보석이 손 안에 들어왔을 때 뽐내며 내세우는 것보다 잃을까 봐 겁을 내며 꽁꽁 감춰 두는 게 보편적인 반응이다. 지나치게 특별했던 내가 바로 그런 보석이었고 그 결과, 당사자인 내 의사와 상관없이 지독한 과보호로 이어졌다.

고립된 환경 속에서 나는 무료한 나날들을 쌓아 올리던 참이었다. 언제까지고 칙칙할 것 같았던 분위기는 색다른 감정에 매료된 즉시 다양한 빛깔로 물들었다.

작은 얼굴. 마른 팔다리. 검게 그을린 피부. 까만 콩 같은 게…….

태어나 처음 만나 본 내 또래의 남자애였다. 응당 호기심이 쏠렸다.

내가 나타나면 벽이나 기둥 사이를 막론하고 우선 숨고 보는 짓이 웃겼다. 어떻게든 내 눈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큰 눈을 데굴데굴 굴려 가며 피하는 것 역시 재밌었다. 내 집에서 얹혀사는 주제에 나와 별로 마주 대하기 싫은 티가 역력했지만 걔가 보이면 나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근처까지 다가가 야, 하고 꼭 알은척을 해 댔다. 그럴 때마다 흠칫흠칫 떨리던 걔의 어깨가 인상 깊었다.

“이름, 뭐야?”

좁은 틈새에 숨어든 걔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현우.”

“이름이 두 글자야?”

“아니……. 세 글자.”

“다른 하나는 뭔데?”

“백.”

그걸 끝으로 걔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네 이름은 뭐냐며, 이어져야 할 질문을 기다리면서 내 고개는 점점 뒤로 꺾였다. 신장 차이로 내가 걔를 올려다봐야 했기 때문이다. 멀뚱멀뚱. 그러고 있길 한참이다. 감기듯 걔의 눈꺼풀이 아래로 똑 떨어졌다. 바닥에 뭐가 있는 건가 싶어 덩달아 발밑을 살피던 나는 곧 속았단 억울함에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내 시선은 무척이나 긴 걔의 속눈썹에 완벽히 사로잡혔다. 숱이 많은 걔의 속눈썹은 유난히 까맣고 짙었다.

“나는, 성제이.”

내 이름은 진짜 예쁜 이름이었는데 내가 이름을 말해 줬음에도 걔는 예쁘단 칭찬을 해 주지 않았다. 나는 그만 뾰로통해졌다.

앞을 가로막은 채 내가 자꾸만 쳐다보고 있자 난감한 기색으로 걔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말아 물었다. 방금 전까지 마른 나뭇잎처럼 버석거렸던 걔의 입술은 침이 묻어 촉촉해졌다. 짓씹는 게 습관인지 걔의 입술은 처음 봤을 때부터 핏빛이 돌 정도로 붉고 헐어 있는 상태였다. 아릴 것 같았다.

내 시선은 속눈썹 다음으로 걔의 입술에 처박혀 꼼짝하지 못했다. 가급적 오래오래 눈에 담았다. ……젤리 같잖아. 젤리 같으니까 말랑말랑하겠지?

어수룩하게 음미했던 속눈썹과 달리 필히 부드러울 거란 확신이 들면서 나는 걔의 입술을 만져 보고 싶어졌다. 고작 다섯 살이라서 바람도 소박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내 나이가 다섯 살이 아닌 열다섯 살이었다면 걔의 입술을 빨아 보고 싶단 욕구에 시달렸을지도 모르겠다.

2권

어두웠던 방 안이 서서히 환해졌다. 조그맣게 벌어진 커튼 사이로 들어온 아침 햇살 한줄기가 바닥에 동그란 무늬를 만들었다. 마치 물이 고인 웅덩이처럼 어른어른하다. 불편하지도 않은지 현우는 한쪽 발만 안으로 접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딘가를 보고 있기는 하나 눈동자 초점은 흐릿했다. 그동안은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고민거리가 있어도 피곤함이 먼저였다. 드러눕는 것만으로도 졸음이 쏟아지고 저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어 버리곤 했었는데 무려 이틀 밤을 연속 뜬눈으로 지새우는 중이었다. 살면서 굉장히 드문 경우였다. 감았다 뜬 눈꺼풀이 무겁다. 창밖에서 들려온 참새 지저귀는 소리에 살짝 정신을 차리는가 싶던 현우의 고개가 다시 힘없이 침대헤드에 기울어졌다.

「너 사격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고 보니 제이는 오메가의 전유물인 사격을 베타인 저가 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거리낌도 내비친 적이 없다. 태어나기 전부터 권력을 쥔 알파, 오메가만 모여 있는 체대는 홀로 다른 형질인 저를 향해 기본적으로 불쾌함을 깔고 있는 곳이었다. 입학 초반에는 알파, 오메가가 베타인 저를 적대시하는 정도가 극심해 곤혹스러웠을 정도였다. 학교 측에서 연구를 위해 요구했던 제 능력은 단지 서커스단의 묘기처럼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정신적으로 갉아 먹히니 두통은 만성이 됐다. 겁이 났다. 힘들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제 속을 드러내 봤자 꼴만 우습게 비춰질 뿐이고 그럼 괴롭힘은 더 심해질 테니 누가 대놓고 무시하거나 욕을 해 와도 덤덤하게 넘기려 애썼다. 그런 저 때문에 간혹 더 화를 불렀던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제이는 여느 알파, 오메가와 다르다. 그렇다고 저를 불쌍히 여기거나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훈련 있냐고 묻는 어조가 동등한 선수를 대하듯 그저 평범했다. 그날 사격하는 걸 보여 달란 제이의 톤도 평소와 같아서 내심 들떴었던 것 같다. 제이는 고작 다섯 살 때에도 우성알파였다. 그때 함께 살았던 적이 있어서, 그래서 저한테 선도 긋지 않고 벽도 치지 않는 걸까?

「나 너 사격하는 거 보면서 자위할 거라.」

빛깔마저 선명하게 펼쳐진 어느 장면에서 현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목 아래까지 붉게 물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간절히 꿈이길 바라 봤지만 이틀 전 일은 절대로 꿈이 될 수 없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데 다섯 살 때 제이 목소리는 꾀꼬리 같았다. 맑고 고왔다. 그런 목소리가 어떻게…….

때 되면 누구나 거치는 변성기란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저보다 어리고, 훨씬 작았던 아이가 자라면서 변성기를 거쳤을 거라고 가늠하니 바보처럼 이질감이 심화된다. 거칠게 갈라졌던 제이의 신음이 여태 귓가에 고여 머무는 중이었다. 허벅지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현우의 손가락이 미약하게 꿈틀댔다. 순간 목구멍을 긁듯 아프게 침이 삼켜졌다.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은 현우는 제이가 겹쳐 잡았던 제 손등을 반대쪽 손끝으로 조심히 쓸어 보았다.

「언제 적 다섯 살이야.」

다급히 눈을 질끈 감아 보았으나 떠오를 건 전부 떠올라 버린 뒤다. 체온이 급속도로 상승한다. 덥다. 한숨을 터트린 현우는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