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2세, 현대판 왕자님 석현과의 결혼으로 21세기 신데렐라가 된 한슬아.

동화처럼 행복한 미래를 꿈꿨건만 그녀의 미래는 불행했다.

결국 자살을 결심한 그녀의 앞에 ‘악마’ 이안이 등장하는데.

“나랑 계약하면 네가 바라는 건 뭐든 세 가지를 들어주겠다.

너를 여기까지 내몬 놈들에게 복수하는 것도 가능하지.”

“……대가는 내 영혼인 건가요?”

“그래.”

이미 죽음을 결심했던 슬아는, 이안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윽고 이안의 손이 떠나간 발에는 예쁜 유리 구두가 신겨 있었다.

신데렐라가 신었을 법한 아주 예쁘고 아름다운 구두가.

“첫 번째 소원은 뭐지?”

첫 번째 소원이라. 고민할 것도 없이 정해져 있었다.

슬아는 이안의 보라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 빌어먹을 새끼를 만나기 전인 10년 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하야시

몽환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게 소망.

종이책 출간작

뱀파이어의 꽃

뱀파이어의 키스

뱀파이어의 별

악마를 탐하다

E-BOOK 출간작

그 영애의 사정

귀연화

신과 사는 방법 연재 중.

1권

아무리 마음이 떠났다고 할지라도 남편이 다른 여자와 외도하는 걸 보고 싶을 리가 없었다. 슬아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액자였다. 슬아는 액자를 집어 들었다. 액자에는 잠깐이나마 행복했던 결혼 초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때만 해도 이 행복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꿈이었다니.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서 당신 때문에 포기했던 내 삶을 되찾고 싶어. 내 꿈도 이루고,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다 하고 살고 싶어.

하지만 그건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었다. 바라면 바랄수록 비참해지는 꿈.

쨍그랑.

슬아의 손에서 떨어진 액자는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유리 조각에 발이 베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슬아는 그 위를 걸어갔다. 피 묻은 발자국이 꼬리처럼 길게 늘어지며 흔적을 남겼다.

침대에 걸터앉은 슬아는 협탁에서 칼을 꺼냈다.

“많이 아플 거 같네.”

하지만 이 고통만 참아 내면 영원히 편안해질 수 있겠지.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조금만 참자고 생각하며 슬아는 손목에 칼을 가져다 댔다.

살짝 대기만 했을 뿐인데 살이 베이고 피가 났다. 칼이 깊게 파고들면 들수록 고통은 심해졌다. 각오한다고 해서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읏…….”

신음이 절로 나왔다. 그냥 포기하고 싶을 만큼 너무 아팠지만 이걸 참아야 죽을 수 있을 테니 이를 악물고 칼을 쥔 손에 힘을 주려는 순간.

“정말 이대로 죽을 생각인가?”

어둠 속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 칼을 쥐고 있는 슬아의 손을 잡았다. 당황한 슬아는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보석을 박아 둔 듯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였다. 보고만 있어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둠을 녹여 놓은 것 같은 새카만 머리칼도 인상적이다. 곧게 뻗은 콧날과 이지적인 눈 등 남자의 외모는 상당히 준수했다.

“당신…… 누구야?”

“내 이름은 이안 폰 루시퍼.”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너희 인간들은 우리를 악마라고 부르지.”

악마라고? 이 남자가?

“농담도 작작해.”

악마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슬아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 악마가 어디 있어?”

“여기.”

얼음처럼 차가운 남자, 이안의 손이 좀 더 위로 올라와 칼을 잡고 있는 손목을 감싸 쥐었다. 손을 감싸는 시린 감촉에 슬아는 저도 모르게 칼을 놓쳤다.

한데 칼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붕 떠 있었다. 그뿐일까. 쉴 새 없이 흐르며 옷과 이불을 더럽히던 피가 멈췄다. 상처 부위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걸 보아 상처도 아문 모양이다.

“당신…… 정말 악마인가요?”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마법. 악마이기에 가능한 일. 상대가 악마라는 걸 확인하고 나니 말이 저절로 높아졌다. 이안은 대답 대신 가볍게 웃었다. 긍정이었다.

세상에 정말 악마가 존재할 줄이야. 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안을 쳐다봤다. 긴장감에 심장이 부질없이 뛰었다.

“당신이 정말 악마라면 왜 제 앞에 나타난 거죠?”

“네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해서.”

이안은 슬아의 뺨을 가볍게 쥐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랑 계약하면 네가 바라는 건 뭐든 세 가지를 들어주겠다. 너를 여기까지 내몬 놈들에게 복수하는 것도 가능하지.”

“……대가는 내 영혼인 건가요?”

“그래.”

영혼을 대가로 한 계약. 그냥 듣기엔 섬뜩했지만 무서워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좋아요.”

어차피 죽으려고 했는데 영혼을 바치는 일이 무에 대수일까.

이 보잘것없는 영혼을 대가로 저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그게 더 보람찬 일이었다.

“할게요, 계약.”

2권

“이건…….”

휴지통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휴지에 묻어 있는 선명한 붉은색은 분명한 피였다. 아침에 나갈 때 휴지통을 비웠던 터라 안에는 피가 묻은 휴지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양의 피가 묻어 있었다. 슬아가 흘린 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이안 씨가 흘렸다는 의미인데…….’

코피라도 흘렸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양이 너무 많았다. 걱정됐다.

이안이 괜찮은지 봐야 할 것 같아 슬아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성큼성큼 올라오긴 했는데 막상 문 앞에 서니 떨렸다.

“후우.”

슬아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쪽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혹시 쓰러진 건 아니겠지?’

문득 든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대답이 없는데 문을 열다니, 대단한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걱정이 돼서 슬아는 문을 열었다.

물론 벌컥 열거나 하진 못하고 아주 소심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열었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유난스럽게 크게 들렸다. 불이 꺼진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방의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침대가 불룩했다. 침대 머리 쪽에 이안의 머리가 보였다.

“이안 씨, 자요?”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정말로 자는 건지, 혹 쓰러진 건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 슬아는 이안에게 다가갔다.

평소였다면 작은 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해서 깼을 그인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역시 아픈 걸까. 피를 토할 정도로 아픈 거면 무슨 병이지. 아니, 그보다 악마도 병에 걸리는 걸까?

다가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걱정도 많이 됐다. 이안의 앞에 선 슬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갑네.’

열은 안 나는 것 같은데. 눈을 감고 있는 얼굴에서 아픈 기색도 딱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럼 피는 왜 토한…… 으앗!”

느닷없이 팔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인지라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시야가 빙글 돌고 등이 푹신한 침대에 닿았다. 천장 대신 이안의 얼굴이 바로 위에서 보인다. 이안의 아래에 깔린 것이다.

어느새 양쪽 손목이 잡혀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시선에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슬아는 이안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의 목 언저리에 시선을 두었다.

‘으악.’

그것도 잠시, 이안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그의 벗은 상체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묘한 적막감이 흘렀다. 어색하면서도 어쩐지 야릇한, 이상한 적막감이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남자의 방에 찾아온다는 건…….”

적막감을 먼저 깨뜨린 건 이안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인 이안이 슬아의 귀 언저리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 때문에 상체가 겹쳐지면서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심장 박동이 들렸다. 쿵, 쿵.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흑심이 있다는 거라던데.”

약간 들뜬 숨이 귀에 닿았다. 순간적으로 얼굴에 열이 훅, 올랐다. 눈이 번쩍 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