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 생각했다.
그와 영원히 함께할 거라 생각했다.
……그의 배신을 눈앞에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첫사랑이라 생각했다.
그녀만이 나를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잔인하게 버림받기 전까지는.



약혼자의 배신 후 마음을 닫아버린 서영, 첫사랑에게 버림받은 후 상처입고 절규하는 태하.
깊고 차가운 그 밤, 말없이 나눈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위로. 그리고 침묵.

햇살 가득한 봄날의 두 번째 만남은 이제 그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데…….

권서현(루미르제)
깨으른여자들에 상주 혹은 가끔 출몰.

출간작:
종이책 - 밤의 끝, 메이-디셈버, 내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애정 불변의 법칙
이북 - 마지막 유혹, 썸머 타임

“공연 보려고 영국까지 가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요.”

“영국 가봤어요?”

“아뇨. 한국을 벗어나 본 적도 없어요.”

늘 새가 되어 훨훨 나는 꿈을 꾸었다. 마음속에는 불꽃이 타는데 한 번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음악 때문인지, 아니면 빈속에 마신 술이 취해오는지 아까와 달리 말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혼자 외국 땅을 밟는 기분은 어떨까요? 혼자서 센강변을 걷고, 혼자 안개가 낀 수은등 아래를 걷는 기분은 어떨까 생각하곤 해요.”

“혼자 여행하고 싶어요?”

그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다른 누군가와 같이 여행하는 상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심지어 재형과의 여행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다들 꿈꾸는 신혼여행이라든가 그런 것도 말이다.

“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냥 혼자 여행하고 싶어요.”

“흠.”

남자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어차피 혼자 가는 인생이니 다를 거 있겠어요.”

그의 말에 외로움이 묻어나와 서영은 동질감을 느꼈다. 처음 보는 남자인데도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혼자 가는 인생이라. 자신에게 이만큼 잘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까? 서영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돌았다. 서영은 손가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담담히 말했다.

“실은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

이 남자에게만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요?”

서영은 바에 걸린 벽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한 세 시간 남았네요.”

“그래요? 그런데 왜 혼자 이런 데 있어요?”

“상관없어요. 축하받고 싶지도 않고, 축하받고 싶은 사람도 없어요.”

재형이? 엄마? 아버지? 주변의 사람들 중 누가 진심으로 그녀의 탄생을 축하해줄까?

“그럼 나라도 축하해줄게요. 내가 한 잔 더 사죠.”

남자는 비어 있는 그녀의 잔을 보더니 바텐더를 향해 손을 들었다. 서영은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아뇨, 괜찮아요.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