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황녀 1,2권 (전 3권 완결 예정) - 류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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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로노블
작가명
류주연
발행일자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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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는 왕자와 결혼 안 할래요. 아버지 곁에서 평생 살고 싶어요.”

       

      유약하고 아둔하기로 소문난 황녀, 아폴로니아.

      시녀들에게 약혼자를 빼앗기고 거듭 파혼당해도 화조차 내지 못한다.

       

      쓸모없는 것. 물러가라!”

       

      황제는 그녀를 미워하고 귀족들은 그녀를 비웃었다.

      황녀가 거슬렸던 황제의 여동생 페트라 리페르는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를 보내고.

       

      언제나처럼 임무를 전달받고 궁에 침입했던 유리엘 비체는

      자신을 기다리던 황녀의 덫에 걸린다.

       

      알다시피 너는 돌아가면 죽어. 아마도 무척 고통스럽게.

      나는 너에게 다른 선택지를 줄 수 있어.”

       

      황위 찬탈.

      그녀의 목표는 뚜렷했다.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다.

       

      네 이름이 뭐든,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무슨 일을 했든 상관없다.”

       

      유약하고 순진하다는 소문과 달리,

      확신에 찬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앞으로 나를 위해 살아.”

       

       

      2

       

      죽은 듯 살아라. 살고 싶으면 어떤 특별함도 가져서는 안 된다.’

       

      여전히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춘 채,

      순진하고 어리숙한 모습을 연기하는 아폴로니아.

       

      황제의 의심과 경계에서 벗어난 아폴로니아는

      오랫동안 염원했던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한다.

       

      그러던 중, 전쟁 포로로서 제국에 끌려온

      라잔의 왕녀 에반젤린 리에트에게 어떤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전하도 만나고, 저는 운이 좋네요.

      두 얼굴의 황녀, 당신은 정말 직접 한 번 보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뭐라고 했죠?”

       

      자신의 비밀 역시 꿰뚫고 있는 에반젤린에게

      아폴로니아는 은밀한 거래를 제안한다.

       

      그리고 황제를 적으로 둔 이들의 마음을 돌리며

      아버지를 향한 복수에 박차를 가하는데.

       

      잃었던 황위를, 나의 제국을 반역자의 손에서 되찾아 올 것이다.”





       

       


      류주연



       

       



      1

       

      불쌍한 황녀 전하. 너무 순하기만 하셔서…….”

      순한 건지, 바보인 건지 모르겠어요. 아드리안을 아직도 내치지 않았다니.”

      남자들 마음 하나 붙잡지 못하면 황녀가 다 무슨 소용이야.”

      이 정도면 전하께서도 당할 만해서 당한 거 아닌가.”

      한심한 황녀. 눈앞에 만찬이 차려져 있는데도 그걸 떠먹지도 못하는 모자란 사람. 그들은 아폴로니아가 자리를 벗어난 후에도 한참을 쑥덕거렸다.

      온갖 속삭임과 눈초리를 뒤로하고, 한 떨기 백합처럼 가냘픈 아폴로니아는 청초한 걸음걸이로 황제궁을 나서서 바깥뜰로 향했다.

      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며 누군가를 찾았다.

      전하! 전하! 이쪽이에요.”

      그녀 뒤에서 귀여운 목소리가 속삭이듯 불렀다. 아폴로니아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얼굴을 빼꼼 내밀고 손짓했다.

      배은망덕한 시녀, 주인을 무는 개, 희대의 탕녀.

      아드리안 리스였다.

      아드리안!”

      아폴로니아는 시녀의 이름을 한 번 외쳐 부르더니 빠른 걸음으로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대신들 중 하나가 보았다면 드디어 정신을 차린 황녀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시녀에게 뺨이라도 한 대 치는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잘해 주었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아폴로니아의 얼굴에는 눈부시게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조금 전 속눈썹 끝에 매달렸다가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증발이라도 된 듯 흔적도 없었다.

      그럼 성공이군요?”

      네게 깊이 빠진 모양이야. 고생이 많았다.”

      약혼자의 배신을 입에 담는 황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전하께서 시키는 대로 한 게 다인데요. 누구를 보내도 성공했을 거예요.”

      아드리안이 겸손하게 말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한편으로는 아쉬워요. 전하께서 마음만 먹으면 로뮈르 왕자를 직접 유혹해 발밑에라도 꿇리셨을걸요.”

      로뮈르 왕국이 뭐라고 그걸 아쉬워해.”

      아폴로니아가 차갑게 웃었다. 불과 몇 분 전 눈물을 글썽이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냉정함이었다.

      그보다 왕자가 네게 청혼하면…….”

      오늘 일이 바로 로뮈르 국왕의 귀에 들어가도록 손을 썼어요. 충동적으로 파혼까지 했지만 국왕은 죽어도 일개 하급 귀족을 왕자비로 받지 않을 거예요.”

      아드리안은 이미 주인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명랑하게 보고했다.

      잘했다, 나의 보물. 이러니 너만 아무 데도 안 보내는 거지.”

      아폴로니아는 충성스러운 시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5년 전 아드리안과 주종의 연을 맺은 날부터 단 한순간도 이 아이의 가치를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로뮈르 왕국의 왕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아폴로니아는 언제나 그렇듯 황제가 정해 주는 혼사에 순종했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 뒤로 시녀를 시켜서 왕자 쪽에서 파혼하도록 유도했을 뿐. 아름다운 아드리안을 일부러 더 아름답게 꾸며 왕자의 시중을 들도록 했을 뿐. 혼담이 오가는 몇 달 동안 왕자를 치밀하게 조사해서 아드리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취향에 맞추었을 뿐.

      다른 아이들의 연락은?”

      말도 마세요. 감사하다는 편지가 끊이지 않고 오고 있어요. 비앙카는 둘째 왕자를 출산한 와중에 전하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고요.”

      선물로 은을 좀 보내야겠구나.”

      아폴로니아의 충직한 시녀는 아드리안뿐만이 아니었다. 아폴로니아의 뒷공작으로 훌륭한 약혼자들과 결혼해 왕비가 된 다른 시녀들은 이제 그녀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 되어 있었다.

      은을 보내면 그만큼의 황금이 돌아올걸요.”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다들 전하의 일이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언제든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아폴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참 오래도 기다렸지.”

      …….”

      , 당연한 거 아니겠니. 아버지도 어머니와 선황을 죽이는 데 10년 공을 들였으니.”

      아폴로니아가 피식 웃자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무시무시한 말과 대조되는 차분한 태도에 아드리안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주인은 항상 그랬다. 성녀 같은 미소를 띠고 비수를 벼리는 분.

      그녀의 목표는 뚜렷했다.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다.

      다시 빼앗아 오려면 그에 못지않게 준비해야 하지 않겠니?”

      황위 찬탈. 아폴로니아의 계획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찬탈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것이었으니까. 입으로는 역모를 말하면서도, 아폴로니아는 따뜻한 봄바람을 즐기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오늘의 깔끔한 성공을 되새겼다.

      아버지, 저는 왕자와 결혼하지 않을래요.’

      왕비가 아니라 황제가 될 거거든요.

      아버지 곁에서 평생 살고 싶어요.’

      정확히는, 아버지가 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살고 싶어요.

      기다려요 아버지, 딸이 가고 있어요.

      빼앗긴 내 것을 되찾으러.

       

       

      2

       

      그녀는 책상에 있는 서적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에반젤린이 책을 떨어트린 자리로 다가갔다.

      어어, 제가 할게요!”

      아폴로니아가 떨어진 책을 주워서 돌려주려 하자 에반젤린이 양손을 내저으며 거부했다. 그녀 또한 자신이 무슨 책을 보는지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럼 설마 나와 비슷하게 몰래 병법이나 정치 서적을……?’

      아폴로니아는 그녀가 자신과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집어 든 책의 표지를 보았다. 몇 초 뒤 아폴로니아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10가지 마물과 그들의 성생활……?”

      ! 이건 참고용이에요!”

      에반젤린이 소리를 지르며 긴 팔을 뻗어 아폴로니아가 집어 준 책을 덥석 가져갔다. 아폴로니아는 그 기억을 떨치고자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그 옆의 책을 집어 주었다.

      이번에는 다르겠지. 왕녀가 나온 코너는 역사학 책이 많으니까……

      그러나 손에 잡힌 은빛 책의 표지에는 또 다른 낯 뜨거운 제목이 적혀 있었다.

      자칼로페와 늑대의 교미, 생생한 목격담.”

      아니, 그건 제가 공부가 좀 필요해서…….”

      에반젤린은 울상이 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아폴로니아의 손으로부터 책을 빼앗아 갔다.

      외눈까마귀의 난교, 그들은 음란한 것인가?”

      흐아아아악! 안 돼!”

      짝짓기 방식이 가장 난잡한 마물그들과 인간의 공통점.”

      ! 이리 주세요!”

      떨어진 책을 주워서 건네줄 때마다 에반젤린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지막으로 하루에 100번을 교미하는 그들은 누구인가?를 건넸을 때 그녀는 거의 바닥에 앉아 울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제 취향이 이런 것이 아니고요, 아니, 취향이 맞기는 한데.”

      그녀는 애써 책을 주워 모으며 두서없는 변명을 했다.

      이건 다 공부에 참고하는 거라구요. 고향의 도서관에는 이런 책이 잘 없어서……. 키우던 애완동물들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볼 수 있고…….”

      아폴로니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제가 성적인 방향으로 통일되어 있었지만 그 책들은 모두 학술적이었다.

      마물에 미쳐 있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보네.’

      마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들었어요. 오라버니와의 일로 지쳐 있을 텐데 학구열이 대단해요.”

      진심이었다. 포로로 잡혔다가, 적장의 시녀 비슷한 지위로 떨어진 왕녀가 쉬면서 처음으로 하는 일이 공부라는 것은 대단했다. 에반젤린은 그녀의 칭찬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몸은 괜찮아졌나요? 시합 때문에 많이 다쳤다고 들었어요.”

      …… 딱히 다친 데는 없어요. 좀 지치기만 했었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에반젤린의 얼굴이며 팔은 온갖 멍과 찰과상으로 울긋불긋했다.

      그게 다 시합으로 다친 거 아닌가요?”

      워낙 제가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해서…… 뼈 안 부러지면 안 다친 거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녀는 아폴로니아가 만나 본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소년 같은 분위기는 리샨 지방의 타냐와 비슷했지만 더 학구적이고 괴짜 같았다. 아폴로니아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그녀는 빨리 책을 읽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그 표지를 보고 있었다.

      에핀하르트 대공은 방에 없나 보군요.”

      글쎄, 저한테는 동궁 안을 편하게 돌아다니라고 한 게 다였어요. 그 말대로 놀고 있었더니…….”

      에반젤린은 어느새 책들을 수습하고 책상 위로 보기 좋게 쌓았다.

      그랬더니 전하도 만나고, 저는 운이 좋네요.”

      그녀는 맞은편에 앉으며 고개를 들어 아폴로니아를 바라보았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한 시선이었다.

      저를 만난 것이요?”

      . 저는 전하가 아주아주 재미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순간 아폴로니아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 전 서적을 봤을 때처럼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다. 에반젤린은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아폴로니아가 흥미로운 마물이라도 되는 듯.

      황궁에서는 그 누구도 아폴로니아를 그런 눈빛으로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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