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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오로지하다> 초판본 전권 출간 기념으로 3권 초판본 구매자 분들께는 일러스트 엽서가 들어간 책이 배송됩니다.
비극적인 화재 사건으로 부모를 잃은 태평.
악몽에 갇혀 살던 그는 어느 날, 봄볕 같은 소녀를 만난다.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소녀, 로지.
오직 로지 곁에서만 태평은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널 알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이를 악물었다. 웅크리고 잠들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준비되지 못한 고백들이, 비처럼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로지는 갑자기 나타났던 그날처럼 갑작스레 이별을 전한다.
그리고 7년, 로지와의 끔찍한 이별을 견딘 그는
삶에 유일한 사랑, 오로지를 만나기 위해 돌아왔다.
7년이면 충분했을까, 네가 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기에?
죽기 위해 살아가던 그와 그가 오로지 사랑했던 그녀.
이들의 뜨거운 얼음 같은 이야기.
이드한(rainbowbees)
마음에 안 드는 글이라도 쓰면 퇴고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그럴 기회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씁니다.
이메일 : rainbowbees@naver.com
[1권]
“11시 30분으로 해.”
“…….”
“내 전화 시간은.”
통화를 하자는 말이 믿기지 않아 고개를 돌렸는데, 태평이 기다렸다는 듯 로지의 시선을 잡아챘다. 마주 닿은 시선이 얽히며 두 사람은 서로의 눈동자만 빤히 바라보았다. 켜져 있던 센서등의 불이 꺼질 때까지.
로지는 어두워진 현관에 몸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조금씩 멀어지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뚜벅거리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로지는 시선을 뺏긴 사람처럼 현관문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따뜻해.”
가까스로 시선을 내린 로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태평과 다투는 동안 하얗게 질려 있던 손끝에 혈색이 돌고 있었다. 손끝에서 퍼지기 시작한 온기는 이윽고 온몸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로지는 딱딱하게 굳어 있던 무언가가 스르륵 녹아내리는 걸 느끼며 가슴 위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중략)
“미안해.”
버석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로지는 가볍게 도리질을 쳤다.
“미안하기는, 너한테 보여 줬을 때부터 그건 이미 네 그림이었어.”
괜찮다고 말한 로지는 태평의 등허리를 토닥였다. 그 작은 손이 전하는 울림이 태평의 가슴 밑바닥까지 전해졌다.
바보 같은 뱁새. 그래서 더 예쁜…… 오로지.
그림을 빼앗긴 사람은 태평이 아니었다. 로지였다. 그런데 정작 위로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라니. 그게 너무 안타까워 미칠 것 같았다. 태평은 로지가 쓰고 있는 헬멧에 그의 뺨을 가져갔다. 로지의 뒤로 해가 완전히 져서 스산해진 강가가 보였다.
그 어둠 속에 서 있는 어린 시절의 태평이 보였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이었다. 올리버는 한국과 작별 인사를 하라고 태평을 데리고 이곳에 왔었다.
태평을 업은 올리버는 나쁜 기억들은 모두 이 강에 던져 버리고 영국에서 새롭게 시작하자고 했다.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태평은 대답 대신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강 건너 도로에 줄지어 서 있던 차들의 붉은 브레이크 등 때문이었다. 그 빨간 불빛들이 트리를 감쌌던 꼬마전구 같아서, 불에 휩싸여 피눈물을 흘리던 부모님의 눈처럼 보여서…… 태평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늘도 차들은 새빨간 브레이크 등을 환히 밝힌 채 기다란 꼬리를 만들고 서 있었다. 태평은 어렸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똑같은 풍경을 두 눈에 똑똑히 담았다.
“오로지.”
로지의 이름을 부른 순간, 로지가 쓰고 있던 헬멧 위로 뜨거운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태평은 그의 눈물이 떨어진 곳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감사함을 담은 입맞춤이었다.
악몽을 떨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는 있게 되었으니까. 로지와 가까이 닿아 있는 만큼, 그의 마음도 로지의 마음에 마주 닿았으니까.
“좋아해.”
머릿속을 꽉 채운 감정이 태평의 입술을 스치고 떠나갔다. 로지의 팔이 그의 허리를 느릿하게 당겨 안는 게 느껴졌다. 서로의 몸만 꼭 끌어안은 채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정적을 흘려보낸 뒤 로지가 속삭였다.
“너만 돈 거 아니야.”
“…….”
“나도 완전히 돌아 버렸어.”
“…….”
“김태평한테.”
감당할 수 없는 충만한 감정이 태평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낮은 한숨을 몰아쉬며 로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터질 듯이 쿵쿵대는 심장과 달리 그의 얼굴은 잔잔한 평화로 깊게 물들고 있었다.
[2권]
“드디어 만났네요, 우리.”
낮고 깨끗한 목소리로 건넨 남자의 인사에 로지의 눈은 그의 어깨 위로 향했다. 빳빳하게 날이 서 있는 셔츠에 감싸인 탄탄한 목이 보였다. 고개를 조금 더 들어 남자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
남자의 눈과 마주친 순간 로지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잔뜩 경직된 로지의 표정과 달리 남자의 입매는 슬쩍 풀렸다.
“오랜만이에요. 오로지 선배님.”
가느다랗게 찢어진 눈이 나붓하게 접혔다. 로지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믿을 수가 없었다. 태평이 지금 제 눈앞에 서 있는 것도, 그가 티끌 한 점 없이 맑게 웃고 있는 것도.
“……태평.”
입가에 맴돌던 이름이 기어코 튀어나왔다.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태평은 허리를 숙이고 그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바람에 축축한 그의 숨결이 로지의 코와 입술 위로 가볍게 흩어졌다. 입술이 닿은 것도 아닌데, 로지는 온몸이 긴장으로 굳는 걸 느꼈다.
“이제 내가 보여요?”
“…….”
“다행이네요. 이제라도 알아봐서.”
피식 웃는 태평의 등 뒤로 한기를 실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가 열어 놓은 창문 탓인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모습에 태평은 잇새로 혀를 차며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왜…….”
여기에 온 거냐고 물으려던 목소리가 어깨를 감싼 코트에 의해 삼켜졌다. 고개를 떨군 로지는 망토처럼 걸쳐진 옷을 바라봤다. 태평의 무릎 위를 덮고 있던 코트가 제게는 발목까지 길게 내려와 있었다. 그의 옷을 걸친 로지가 흡족했는지 태평이 느른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흠칫 놀라 코트를 벗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냥 입고 있어요.”
태평이 경고하듯 쏘아붙였다. 말로는 부족했는지 퍼렇게 힘줄이 돋은 손이 코트 쪽으로 다가왔다. 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으로 코트의 단추를 채운 태평은 마지막으로 코트 깃도 바짝 세웠다. 훈훈한 온기를 품은 옷과 달리, 싸늘한 음성이 로지의 귓가를 스쳤다.
“이번에도 버리면 용서 안 할 테니까.”
로지는 태평을 멍하니 바라봤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옷도, 이 꽃도.”
커튼 속에 숨겨 두었던 꽃다발을 꺼낸 태평은 그걸 로지에게 안겼다. 피처럼 붉은 장미꽃을 떠안게 된 로지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모든 게 사라져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하지만 그 소원은 얼굴에 닿는 뜨거운 체온에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볼을 건드리는 손끝에 놀란 로지가 감았던 눈을 떴다. 태평은 로지의 얼굴을 만졌던 손으로 자신의 뺨을 문지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걸, 그도 확인해야겠다는 것처럼. 착잡함이 묻어 있던 태평의 얼굴에 희미한 열기가 오르더니, 그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리고 나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입고 있는 옷에서 꽃향기보다 더 뚜렷한 체향과 차디찬 향수 냄새가 섞여서 났다. 어렸을 적의 태평에게서 맡아 보지 못했던 그 쌉싸름한 향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
[3권]
‘내가, 왜 그랬을까.’
저수지에서 있었던 일을 여러 번 곱씹어 봤지만, 로지의 뇌는 그 어떤 실마리도 내놓지 않았다. 마치 누가 단칼에 싹둑 베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로지는 태평에게 발견되기 전의 기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많이 놀랐겠지.’
자투리만 남은 기억 속에 선명한 건 온통 태평과 관련된 것뿐이었다. 절박하다 못해 괴로움에 물들었던 얼굴, 제 이름을 부르던 갈라진 목소리, 자신을 끌어안은 팔이 무섭게 떨리던 느낌까지.
이성을 잃은 태평은 흡사 미친 사람처럼 굴었지만 로지의 머리를 감싸며 끌어당기던 그의 손은 평소처럼 부드러웠다. 코끝에 눌린 그의 가슴팍에서는 익숙한 냄새가 났고, 물기에 젖은 그의 몸은 로지의 떠는 몸을 달래 줄 만큼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으니까.
‘집에 가자.’
집으로 가자는 태평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로지는 하마터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착각할 뻔했다. 자신을 안고 걷던 태평의 다리가 여러 번 휘청이지 않았다면, 그의 입술이 눈물을 참듯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지 못했다면, 이 모든 게 악몽이었다고 생각하며 간단히 넘겼을 수도.
‘이제 어쩌면 좋지.’
로지는 마른 입술만 달싹였다. 불필요한 오해는 풀고, 태평에게 준 상처도 다독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머리가 생각하는 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그저 숨이 막힐 뿐이었다. 물에 빠졌을 때도 편했던 호흡이, 왜 지금은 질식할 것처럼 막혀 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옆으로 누웠던 몸을 바로 했다. 늘 봤던 천장과 비교가 안 되는 높은 천장이 보였다.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태평은 이불 없이 짙은 남색 가운만 입고 로지에게 등을 보인 채 누워 있었다.
‘태평아.’
크게 부풀었다가 꺼지는 태평의 등은 소리 한 점 내고 있지 않았다. 로지의 편안한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몸을 돌려 태평 쪽으로 다가갔다. 손바닥을 펼쳐 그의 등에 댔다. 두툼한 소재로 된 가운 너머로 뜨뜻한 체온이 감지됐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자신이 여전히 로지인 것처럼, 그도 여전히 태평인 것 같아서.
“건드리지 마.”
사나운 말투에 로지의 손이 반사적으로 그의 등에서 떨어졌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가시 돋친 소리가 다시 들렸다.
“뭐가 문제야.”
“…….”
“내가 다 해결해 줬잖아.”
“…….”
“돈이고, 사람이고, 복수고. 너 귀찮게 하는 것들은 내 손으로 다 치웠는데, 뭐가 또 문제냐고.”
자제력을 잃은 심정을 대변하듯, 태평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격양되어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
“내 눈앞에서, 내 부모가 불에 타 죽었다고 했잖아. 사람 살 타는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진동해. 내 발목을 붙잡고 살려 달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고막을 찢고 싶게 만든다고.”
“…….”
“그런 내가, 이젠 네가 죽는 것까지 봐야 하는 건가?”
거친 언사가 섞인 태평의 말에 로지의 얼굴은 고통으로 얼룩졌다. 로지는 멍한 눈으로 그의 등을 좇았다. 눈앞에 있던 태평의 등이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두려움에 다시 손을 뻗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순식간에 몸을 돌린 태평이 상체를 세웠다. 로지는 자신을 양팔로 가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일그러진 눈이 분노로 치민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붉어져 있었다.
“이게 네가 말한 사랑이야?”
“…….”
“날 버리지 말라고 했더니, 너를 버리는 게?”
“…….”
“내가 고작 이런 꼴을 보려고, 한국에 온 줄 아냐고!”
고집스럽게 로지를 보고 있던 눈이 무너져 내렸다. 둑을 터뜨리고 쏟아진 태평의 분노 앞에서 로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살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고,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나도 나를 모르겠으니 용서해 달라는 말들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차마 뱉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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