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왜 그래요?”
태혁은 마치 혼자의 몸인 것처럼 가뿐하게 걸음을 옮겼다.

“말해주세요, 나한테 이러는 진짜 이유가 뭔지.”

“이유 같은 거 없어.”

거짓말. 눈을 보지 않아도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분명 있었다. 사랑 한 번 못해본 숙맥이지만 육감이라는 건 그녀에게도 존재했다.
“내가 여자로 보이나요?”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던 그가 멈칫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잿빛의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먼지마저 흩날리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하나요?”
“…….”
아릿할 정도로 뜨거운 숨결이 그의 귓가를 달구었다. 심장이 조여 왔다. 너무 가깝다. 이진의 심장이 너무 가깝게 뛰었다.
“못 본 척 하려고 했지만 이미 봐버렸잖아요. 그날 밤 사장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려요. 꿈이 아니라고 자꾸 속삭여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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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거랑 멍청한 거는 달라. 니가 계약서에 사인을 한 순간부터 너는 내 말을 들어야 돼. 여기 와서 감정 허비하며 울고 짜고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연습을 더 해. 여기까지 오느라 체력 낭비하지 말고 춤이 됐든 연기가 됐든 연습을 더 하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사람들이 말하던 무섭다는 말이 어떤 건지 그때서야 이해가 됐다. 지독하게 차갑고 이기적인 남자였다. 하나 밖에 없는 손녀가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할머니를 보겠다고 지친 몸을 이끌고 오는 걸 시간 낭비라고 말하는 태혁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네, 똑똑히 알아들었어요. 어렵게 키워주신 할머니가 아프신 데도 신경 쓰지 말고 제 할 일만 하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되라는 거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진 앞으로 태혁이 성큼 다가갔다. 야릇하게 번진 입가의 미소가 그를 더 잔인하게 보이게 했다. 얼음조각처럼 차가운 그의 얼굴이 이진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의 서늘한 입김이 그녀의 하얀 피부를 할퀴고 지나갔다.

“잘 들어. 내가 너한테 친절을 베푸는 것도 여기까지야. 자꾸 날 자극하지 마. 그리고 싫으면 지금이라도 끝내.”
“아니, 절대 안 끝내요. 사장님이 원하시는 스타, 그거 꼭 하고 말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자존심도 아니고 돈에 눈이 멀어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순간이지만 하태혁이라는 남자를 이기고 싶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누구든 자신을 함부로 하는 사람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고 싶다는 못된 오기가 생겼다. 잠재의식 속에 있던 승부근성이 이제야 꿈틀거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태혁을 지나쳐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한참이나 뭔가를 속삭이고 종이가방을 들었다.
시작했으니 끝장을 봐야겠다. 어수룩하게 굴던 설이진은 이제 끝이다. 더 독하고 더 못되고 더 악착을 떨 것이다. 그게 진정 하태혁 사장이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해주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