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우린 전생에 지독한 원수였던 것 같아요. 그것도 내가 도연 씨를 무척이나 괴롭혔나봐. 그래서 그 죄를 닦느라 도연 씨만 보면 이렇게 안달하는 것 같아.”

마음 줄 곳이 없었다.
하루하루 공허한 나날들. 그때 한 여자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위태로운 뒷모습. 몇 년 뒤 그녀를 다시 봤을 때 그는 운명에 순응해 버렸다.

“알아요? 예전에는 혜율이만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규영 씨가 없는 세상 살아 갈 수 없을 것만 같아요.”

이 넓은 세상 우리 모자 단 둘뿐인 줄 알았다. 그렇게 살았다.
힘겹게 세상과 맞섰다.
비바람이 불어도 태풍이 몰아쳐도 아이만 있으면 된다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우리 곁에 서 있었다.

다은(이경순)

유연한 웨이브를 꿈꾸며 울산에서 오늘도 딸아이와 씨름하며 낮에는 직장인, 퇴근 후에는 엄마라는 직업에 요즘은 글을 쓰기 위한 작업도 병행 중.
멀티형 인간이라 바득바득 우기며 열심히 잘해보기 위해 노력하지만 엄마라는 본분을 제일 뒷전으로 미루고 있음.

로망띠끄에서는 다은으로, 우리집(http://roommate.cafe24.com)에서는 은이라는 이름으로 세 들어 살고 있음.

러블리 러블리 - 종이책 출간
crush on(첫눈에 반하다) - e-book 출간

프롤로그

2004년 4월

원래 봄비란 만물을 촉촉이 적셔주고 겨우내 힘들었던 나무들에게 생기를 주는 부드럽고 따뜻한 이미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창밖에 내리는 비는 부드러운 봄비라기보다는 한 여름 소나기 같이 억세게 쏟아 붓고 있었다.
도연은 현관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작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문이 닫혀 있는 안방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목적했던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 밖 좁은 흙 마당에는 그새 내린 비로 신이 질척거릴 정도로 물이 차여 있었다. 그 마당을 벗어나는 입구에 흰색의 작은 차가 나아갈 방향으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웬 비가 이렇게 내린다냐? 약속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겠다. 어여 다녀와.”

운전석에서 딸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본 덕만은 차의 시동을 켜 둔 채 허둥지둥 내려 망연히 서 있는 도연에게로 다가갔다.

“너무 멀리 대 놔서 내가 옮겼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다녀와. 어서.”
“아버지 이렇게까지 안하셔도 되는데요. 제가 가면 되는데…….”

말끝을 흐리는 딸의 등을 살짝 밀며 덕만은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도연에게 쥐어주었다.

“여기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다녀와라. 다시 당부하지만 운전 조심해라. 알았냐?”
“아버지…죄송…죄송해요. 이런 모습 보이게 돼서 정말 죄송해요.”

끝내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도연의 모습을 보다 시큰해지는 콧날을 하늘로 들었다. 내리는 빗줄기가 흐릿하게 보였다. 언제나 배꽃 같던 딸아이의 여린 어깨가 안쓰러웠지만 덕만은 작은 헛기침 몇 번으로 날려버렸다.

“혜율이 깨서 찾을라. 어서 다녀와.”

흠칫 집을 향해 시선을 던진 도연이 몸을 돌려 차로 향했다. 청바지의 밑단이 순식간에 젖어들며 더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었다.
차의 붉은 등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던 덕만은 몸을 돌려 도연이 나왔던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 창에는 정임이 조금 전 그가 하염없이 보던 곳을 향해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의 뒷모습에 잠시 시선을 던진 덕만은 거실의 중앙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안방을 살폈다.

“혜율이는?”
“아직 자요. 조금 있으면 깨서 엄마 찾을 텐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합시다.”

정임은 덕만의 앞에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참담했던 그날 곱기만 했던 딸의 퉁퉁 부은 얼굴과 조금 전 내려앉았던 도연의 어깨와 만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김장을 가지러 오기로 한 날이 지나도록 도연은 연락이 없었다. 못 오게 되면 이러이러한 이유로 오지 못할 것이라 연락이라도 있었을 텐데 하루가 지나도록 연락은커녕 그들이 하는 전화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걱정에 도연에게 주려고 챙겨 놓았던 김치를 챙겨들고 올라와 딸아이가 사는 집 앞에 서 있건만 답답함은 더욱 가슴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집에도 없고 연락도 안 되고 도대체 무슨 일이래요?”

참다못한 정임이 도연의 집 맞은 편 아파트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앞집에 사람이 없네요.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배꼼 연 문틈 사이로 고개만 내민 앞집 여자에게 정임은 궁금함을 물었지만 그녀는 망설이는 태도만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 혜율이 외할머니예요. 이상한 사람들 아니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야기 좀 해 줘요. 연락도 안 되고 오기로 한 날에 오지도 않고. 답답해서 결국 올라온 거라오.”
“혜율이 외할머니세요? 잠시 만요. 이리 들어오세요.”

여자의 얼굴에 그제야 반가운 표정이 어렸다. 현관문을 열고 그들을 안으로 들인 여자는 다짜고짜 정임의 손을 잡았다.

“어서 빨리 혜율이 엄마한테 가 보세요. 그 몸을 해서 아이까지 데리고 있으려면……. 내가 율이는 봐 준다고 했는데 아이가 도대체 엄마에게서 떨어져야 말이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설마?

“며칠 전에 앞집 난리 났었잖아요. 율이 아빠 술 먹고 와서 난리도, 난리도. 결국 그날은 그렇게 넘어가나 싶었는데 담날 새벽에 율이 엄마 응급차 불러서 병원 갔잖아요.”

온 몸에 기운이 빠졌다. 이렇게 앉아 있지 않았더라면 두 내외 길바닥에 그대로 온 몸을
무너져 내렸을 터였다.

“어떻게? 그럼 서 서방은?”
“모르죠. 뭐 밤에 한번 씩 보면 거실에 불이 들어오는 것 같긴 하던데.”
“우리 아이는 왜 병원에?”
“혜율이 동생이 흘렀대요. 그 난리에 그대로 버티고 있는 게 더 이상한 거지. 하여간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니까.”

뭔가를 들은 것만 같은데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당체 알 수가 없었다. 넋을 잃어버린 정임을 대신해 덕만이 더듬더듬 도연의 행방을 물었다.

“우…우리 아이는 지금 어…디에?”
“요 앞 큰 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있어요. 혜민 병원이라고.”

허둥지둥 흘러내린 몸을 추슬러 앞집을 나섰다. 빨리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가 봐야만 했다. 병원에 도착해 다짜고짜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고 도연을 찾았다. 놀란 것이 분명한 내외를 살피던 간호사는 친절히 병실 앞까지 안내 해 줬다. 소란스러운 6인실이었다. 그 중에서 제일 안쪽 돌봐주는 사람 한명 보이지 않는 침대에 한명이 누워있었고 그 발치에 혜율이 앉아 과자를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혜…혜율아!”

주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침대로 다가가던 두 내외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출 수밖에 없었다. 퉁퉁 부은 얼굴에 울긋불긋 멍이 들어있었고 입술은 한쪽은 찢어져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런 딸이 설마 도연일까 싶어 정임은 눈을 비빈 후 다시 봤지만 처참한 몰골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사람은 분명 혜율의 엄마이자 그들의 딸인 도연이었다.

“이 모든 게 우리 잘못이요. 애초에 말리지 못했던 것도, 이 사단이 나기 전에 미리 데리고 오지 못한 것도. 미친 놈. 뭐가 부족해서 사람을 패. 패기는. 인간이 아닌 거야. 아니야.”
“시끄러워!”

정임의 넋두리에 덕만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고 있다. 정임이 이야기 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렇게 병원을 지키는 동안 퇴근시간 잠시 얼굴을 비치고는 피곤하다며 집으로 들어가는 민재의 행태에 그만 할 말을 잃어 버렸었다. 더구나 같은 병실을 쓰던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입원 한 그 순간부터 민재는 퇴근 시 얼굴을 잠시 비추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한 사람처럼 굴었다고 했다.
병원 의사가 폭행으로 신고를 하겠다고 펄펄 뛸 정도였지만 그는 가장이 집 사람 단속한 것이 뭐가 문제냐며 태연했다고도 했다. 그리고는 유산으로 몸이 힘든 도연 옆에 혜율이를 내려놓고 저는 집에 편안히 자러 갔다고들 했다. 그 모든 이야기에 억장이 무너졌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이참에 정리하고 날개 활짝 펴서 살라 그래.”
“하지만…….”

딱 잘라 말하는 덕만의 이야기에 정임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예전 도연이 돌이 안 된 혜율이를 업고 왔을 때 그때 이혼을 하도록 했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그저 미련 떨어 며 싫다는 도연을 그 집으로 밀어 넣은 것을 생각하면 답답한 온 가슴을 모두 쥐어뜯어도 모자랄 것만 같았다.

“엄마!”

닫혀있던 안방 문이 열리며 작은 남자아이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얇은 봄 내의를 입은 모습으로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찾았다.

“어이구 우리 강아지 일어났어? 엄마는 오늘 일이 있어서 잠시 갔다. 할미랑 같이 아침 먹을 까?”

조금 전의 그 암울했던 감정들은 어디로 갔는지 정임의 눈과 입가에는 작은 주름들이 조랑조랑 매달려 있었다.

“엄마는?”
“오늘 일 때문에 잠시 나갔다. 할미가 우리 혜율이 업어줄까?”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불안하던 혜율의 눈동자가 정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짝거렸다.

“응! 혜율이 업어줘.”

어느새 정임의 등 뒤로 돌아 온 혜율이 목을 감싸 안으며 체중을 실어왔다. 정임은 그런 혜율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받치고 ‘끙’하는 소리와 함께 힘겹게 일어났다.

“힘들잖아. 내려놔. 내가 데리고 있으면 되지. 혜율이 할아버지랑 놀자.”
“됐어요. 다 되어 있는 밥만 푸면 되는데.”

등에서 내리라는 덕만의 말에 더욱 등에 달라붙은 혜율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정임은 주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