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같은 유형을 잘 알아. 상처받은 척, 자존심 상한 척, 똑똑한 척 다 하면서 끊임없이 가진 자와 힘 있는 자가 봐주기를 기다리지. 안 봐주면 봐달라고 교태를 부리는데, 머리는 있어서 대놓고 안 부리고 우회적으로 부리지.”

“난 조롱한 건데 교태로 받아들이다니, 재미있네요. 그러는 당신 왜 사람 헛갈리게 자꾸 꼬리를 치는 건 건데요? 당신이야말로 나한테 지금 봐달라고 그러는 거 아닌가?”


의자를 보고 만지고 만드는 그녀와
의자를 평가하고 사고파는 그가
앉고 싶은 의자를 만났다.

하지만 앉을 수 없고 앉아서는 안 되는 의자이기에
그 의자에 앉지 못하고,
차라리 자신이 상대에게
잠시 앉아서 쉬다 갈 수 있는 의자가 되기를 바랐다.


문제는 그가 그녀에게, 그녀가 그에게 앉고 싶어한다는 것.
문제는 그가 그녀를, 그녀가 그를 안고 싶어한다는 것.

연두

2003년부터 로맨스소설을 써왔다.
그동안 만화 콘티와 홍보기획 일을 겸했지만
현재는 소설 쓰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앞으로도 글의 장르와 형태에 상관없이 쓰고 싶은 글을 쓸 계획이다.

삶을 즐기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게으름을 피우고 온갖 색(色)에 사로잡히지만
인간 존재의 본질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부단히 물고 늘어질 생각이다.

출간작

얼어죽을 놈의 나무
그림자의 사랑
반려
혼미한 정국
그의 모든 것, 또는
내 여자 말희
고슴도치 치료하기
목지국막내공주傳

블로그

키보드와 자전거 http://blog.daum.net/yaundoo

우진은 커피를 마시는 유석을 쳐다보다가 이내 귓불에서 대롱거리는 귀고리에 시선을 가져갔다.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유석의 한쪽 귓불을 혀로 핥았다. 보온 컵에 입을 갖다대고 커피를 홀짝이던 유석이 들고 있던 컵을 떨어트린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귓불만 핥는 게 아니라 귓바퀴도 입 안에 넣고 혀로 핥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아무 일 없는 듯 덧붙였다.

“이름 자체가 tongue인 의자도 있어. 이번엔 그걸로 만들어서 보내.”

유석이 방금 전 그가 핥고 지나간 귀를 손으로 덮었다. 귀는 타들어가는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화끈거리다 못해 쓰라렸다. 그는 동상처럼 귓가를 손으로 덮은 채 서 있는 유석을 내버려두고 자갈 위에 떨어져 있는 컵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남은 커피를 따라 입가에 가져가는데 유석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만 하죠.”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니 붉어진 얼굴을 보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웠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붉어진 얼굴로 진정하려고 애쓰는 유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람을 건드렸으면 감당을 해야지. 왜 약한 척해?”

유석의 얼굴은 더 붉어졌지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은 그를 향했다. 잔뜩 노려보는 눈빛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고 물기 어렸다. 붉디붉은 얼굴과 차가운 눈동자가 묘하게 어울려서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그는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우진은 남은 커피를 입 안에 털어 넣고 보온병을 닫았다. 그가 정유석을 내버려두고 혼자 가려는데 유석이 그에게 말했다.

“더 이상은 나 건드리지 말아요. 작정하고 우영이한테 들러붙는 수가 있으니까.”

그가 몸을 돌려 유석을 쳐다보았다. 유석은 여전히 귀를 손으로 덮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진은 개울가에 발목이 잡힌 듯 그곳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유석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너 같은 유형을 잘 알아. 상처받은 척, 자존심 상한 척, 똑똑한 척 다 하면서 끊임없이 가진 자와 힘 있는 자가 봐주기를 기다리지. 안 봐주면 봐달라고 교태를 부리는데, 머리는 있어서 대놓고 안 부리고 우회적으로 부리지.”
정유석에게 하는 말일까,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말일까, 알 수 없었다. 그는 누구를 향한 경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멈추지 못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유석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응수했다.

“난 조롱한 건데 교태로 받아들이다니, 재미있네요. 그러는 당신은 왜 사람 헛갈리게 자꾸 꼬리를 치는 건데요? 집도 빌려주고, 시급도 올려주고, 급기야는 의자를 천만 원에 사주고, 왜 그러는 건데요? 당신이야말로 나한테 지금 봐달라고 그러는 거 아닌가?”

그가 어금니를 물고 무섭게 노려보는데도 유석은 말을 멈추지 않고 더 긁어댔다.

“혹시 우영이보다 더 힘 있고 돈 있다고 나한테 지금 자랑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동생보단 자길 봐달라고 말이야. 우영이한테 들어보니까 예전에도 우영이 여자 마음 뺏었다면서요? 이제 보니 그 여자애가 일방적으로 당신을 좋아한 게 아닌 것 같아. 당신이 이렇게 꼬리를 치니 그 여자도 헛갈렸던 거지.”
보온병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어찌나 힘을 주어 움켜쥐었는지 하얗게 변했다. 칼날처럼 내리꽂히는 그의 눈빛을 유석이 피하지 않고 마주 응시했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할까 입을 달싹이다가 어느 순간 마주하기조차 싫다는 듯 몸을 돌려 가버렸다.
그녀가 잔뜩 눌러놓은 숨을 토해냈다. 손은 떨렸고, 심장은 거세게 뛰며 두방망이질 쳤다. 진정되지 않는 숨결 사이로 아직도 식지 않고 뜨겁게 타고 있는 귓불이 느껴졌다. 유석은 쓰라릴 정도로 뜨거운 귓불을 다시 손으로 덮었다.
들켜버린 걸까? 사실은 그에게 향하는 마음을 그가 눈치 채버린 걸까. 자꾸만 그의 시선이 신경 쓰이고, 그의 존재가 의식되어서 그녀 스스로도 미칠 것 같은데 그 마음을 들켜버렸다는 생각에 잔뜩 날 선 말들을 뱉고 말았다. 한참 동안 귓가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서 있던 유석이 한숨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미치겠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