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슬픔, 원한과 분노, 애욕과 집착으로 죽어 있던 시간이 사랑으로, 그리움으로 다시 깨어난다.

그는 좀 못된 남자였다. 아니. 냉정하고, 날카롭고, 까다로워 도통 편하게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설렘 가득한 감정에 굴복했고, 그들은 뜨겁게 사랑했다. 비극이 닥쳐오기 전까지…….

혜원은 텅 빈 눈동자로 남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떨고 있었다. 분노로 격앙된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팔과 어깨를 떨며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러니?”
“미안해요.”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래?”
“미안해요.”
그저 말 뿐인, 열의 없고 밋밋한 대꾸는 담담하고 무정했다.
인서는 절망이 가슴 깊숙이 침노하는 느낌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는 끝내 그녀의 팔을 놓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오기가 가득 찬 소리가 독하게 뻗쳐 나왔다.
“시간을 줄게. 더는 요구하지 마. 이게 다야. 더는 안 봐 줘.”
상처 받은 남자가 욕실로 걸어가 문을 쾅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혜원은 무심한 눈길로 멍하니 닫힌 문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움직여 객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별거에 들어갔다. 다섯 살 배기 아들이 유괴되어 죽은 지 아홉 달 후였다.
인서는 절대 이혼만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고, 혜원은 최후의 인심처럼 최 씨 집안의 자존심을 받아 들였다. 정혜원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론 최인서의 아내로 통했다. 만남도, 전화도 없고, 소식조차 알려 하지 않는, 완벽히 타인 같은 아내.

서풍

2000년 문학웹진에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으로 <스완> <그녀를 위하여> <야만의 계절> <애증의 시간> <내가 기다린 사랑> 등이 있다.

E-mail : zephyr1203@hanmail.net

차가 태성그룹 소유의 호텔에 도착했다. 혜원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끝까지 버텨보려 했지만 가능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이내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가 뿌리치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손을 꽉 틀어잡고 호텔 안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혜원은 무작정 붙잡혀 가면서도 호텔 내 커피숍이나 바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격정이 가라앉고 오해가 풀리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로비를 지나 그가 자신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자 얼굴에서 핏기가 쏴 빠져나갔다.
“어디 가는 거예요?”
“어디 가는 것 같아?”
두려움에 찬 물음에 인정머리 없고 얄미운 대답이 날아왔다. 혜원은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눈만 커다래져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문득 잡힌 손등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어루만짐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악당같이 험악한 얼굴에, 말 또한 야비하게 쏟아내고 있지만 혜원은 그가 단지 그런 척, 과장된 위악을 부리고 있다는 걸 그제야 눈치 챘다. 사실 처음 사무실에서 부딪쳐 코피가 나는 그녀를 돌봐주었던 때부터 그는 절대 모질고 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혜원은 불현듯 이 남자를 이처럼 흥분시키는 것이 무엇일까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절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긴장이 느슨해졌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별일이라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혜원은 동요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 VIP 전용 객실인 프레지덴셜 스위트로 들어왔다. 실내는 최고 등급의 공간답게 넓고, 쾌적하고, 고급스러웠다.
객실 한가운데 쯤 와서야 인서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 미니바로 움직였다. 혜원은 넓은 거실 한쪽에 우두커니 선 채 멍하니 그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화가 나 어쩔 줄 모르는, 소년 같고 아이 같은 남자가 눈 안을 가득 채워왔다.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기는 손길엔 짜증이 잔뜩 실려 있었고, 어깨는 긴장감에 단단히 굳어 보였다. 그가 주류 선반에서 양주병을 집어 들고 잔에 거침없이 따르고 있었다.
혜원은 이 냉정하고 빈틈없어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남자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안절부절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에 가슴이 울컥했다. 그녀는 처음의 반항심, 거부감과는 다른 감정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연민이, 안타까워 애련한 느낌이 심장을 저릿하게 눌러왔다.
“좋아한다고 했어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예민하고 날카로워 파열음을 낼 것 같은 이 남자를 더 이상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가 홱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았다. 찡그린 미간에 주름이 깊이 패 있었다.
“영재 오빠한테 상무님 좋아한다고 말했다고요.”
“잘했군.”
그다지 화가 풀어진 말투는 아니었다. 그는 브랜디 한 모금을 삼키더니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못내 마음에 안 드는 듯 억눌린 소리로 내뱉었다.
“우리 관계가 불완전해 그런다고 생각했어. 불안, 초조, 강박, 이 불쾌하고 끔찍한 느낌들이 아직 우리가 완벽하게 결속되지 않아서라고. 그래서 널 가질 생각이야. 지금 여기서.”
“…….”
“아무 소리 안 하나? 뭐라고 말 좀 해 봐.”
강제적이고 완강한 첫마디에 어울리지 않게 자신 없고 초조한 말소리였다.
혜원은 가늘게 떨리는 눈빛으로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하면…… 걱정을 덜 수 있겠어요? 상무님 뜻대로 이곳에서 순응한다면 안심할 수 있겠어요?”
“그래.”
“그렇다면 하세요.”
“흥, 순교라도 하듯 그러는 거, 제풀에 나가떨어지길 바라고 머리 쓰는 거야? 아니. 그래도 할 건데, 어쩌지?”
“아니에요, 그런 거……. 단지 잘 몰라서 겁이나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하얘서 무섭고 걱정돼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망설여지고, 가슴이 졸아들어 죽겠어요.”
떨림 가득한 음성, 하지만 결단이 서린 말소리가 조용히 공간을 울렸다.
그는 놀라고 당황한 것 같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납치라도 하듯 데려와 지금 이토록 치졸하게 굴고 있는 것부터가 그녀의 환영을 일찌감치 포기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혜원은 다 받아주겠다는 듯 팔을 벌리고 있었고, 그것은 인서를 격동시켰다. 그녀가 그에게 드러내는 완벽한 포용, 철저한 신뢰였다.
인서는 더 생각할 겨를 없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가녀린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키스는 환희와 굶주림에 절어 있었고, 여체를 더듬는 손길은 욕심에 조급증을 드러냈다.
혜원은 약탈하듯 입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 그의 혀에 무작정 자신을 맡겨버렸다. 뜨겁고 물컹한 것이 사정없이 그녀의 것을 휘감았고, 전부를 맛보려는 듯 입천장을 샅샅이 훑고 안쪽까지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타액이 엉키고 이내 진한 흡입으로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제 것으로 소유해버렸다.
혜원은 숨을 쉴 수 없게 급속도로 이는 열정에 압도돼 가련하게 그의 호흡에 매달려 있었다. 쌉싸래한 브랜디 향이 목 안으로 흘러들었고, 뜨겁게 빨아들이는 힘이 그녀의 영혼까지 전부 끄집어낼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귓불을 핥으며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연한 살결을 혀로 정성스레 쓰다듬으며 축축하고 매끄러운 그 자리에 가볍게 이를 박아 욕망의 진한 흔적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