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사랑을 짓밟고 가버린 그녀가 ‘한국미술관’의 큐레이터로 10년 만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뻔뻔스럽게 악수를 청하는 그녀는 그를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닌가?
가히 주연 배우를 능가하는 연기력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녀가 진짜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같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속도를 줄이라고요. 이러다 큰일 나겠어요. 제발…….”
핏기 하나 없이 핼쑥한 그녀는 그에게 애원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정말 왜 이래요. 내가 어쨌다고 이런 식으로 고통을 주는 거죠? 이러지 말아요.”
채이는 악을 섰다. 사고에 대한 공포와 함께 그가 자신에게 행했던 수치와 굴욕이 생각났다.

“고통, 지금 고통이라고 했나?”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꺄악!”
속도를 무시하고 달리던 차가 급제동하자 차체가 앞으로 완전히 쏠리면서 옆으로 틀어졌다.

“말해. 말하라고!”
무시무시한 한휘의 다그침에 채이는 귀를 막으며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그래요. 고통. 고통이랬어요.”

“이 정도가 고통스럽다고. 웃기지 마라, 유채이. 차를 몰다 죽는 것은 편한 거야. 알아? 진정 고통이 뭔가 가르쳐줄까? 자신의 심장이라 여겼던 여자가 이유도 없이 미국으로 가버려 부랴부랴 달려가 보니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돈 많은 부잣집 딸의 속임수에 놀아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야. 그리고 그 사실을 여자가 살고 있는 땅에서 뼈저리게 깨달았을 때지.”

“아냐. 아냐.”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채이는 귀를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유가 듣고 싶다고 했지. 그러니 들어.”

“싫어. 거짓말이야. 거짓말.”

주은숙

출간작 : 벨라트릭스 / 키이라 / 너를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