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기억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알았다. 기억력이라는 게 이렇게도 질기고 질길 줄 몰랐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한 순간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다 잊었다고 믿고 싶었던 기억들과 가슴을 설레게 했던 기억들이 흘러나왔다. 빛바래지 않은 채 멀쩡하게 살아나서.


제이슨 로우턴! 어딜 가든 그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흥! 저런 남자가 신사답다고? 대체 어디가?”

최고 명문가의 장손, 영국 내 최고 신사. 절제되고 예의 바른 행동과 사려 깊으며 능숙한 말솜씨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를 동경하게 만든다.

지안 리! 끔찍할 정도로 자존심 세고 도도한 여자다.

“3개월 후라고? 웃기지 마! 절대로 놔주지 않겠어.”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다. 화려하진 않지만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와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는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나의 신경을 긁고 자극한다.

“이 옷은 어떻게 말려요?”
“기다려봐. 의자를 가져올 테니까.”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그만 종알거리고 앉아. 그리고 발 좀 보여 봐.”
제이슨은 악악대는 그녀의 연분홍 입술이 얄미웠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입술을 통째로 집어삼켜 아작아작 씹었으면 좋겠군. 그러면 이 귀 따가운 소리도 듣지 않아도 될 텐데.’
“왜요?”
“어서.”
지안은 자리에 앉으며 옆으로 다가온 그에게 다리를 내밀었다.
“아파?”
“조금요.”
“찬 물수건을 찜질하면 괜찮아질 거야. 기다려봐.”
어느새 물수건을 만들어온 그는 지안의 발목에 찬 물수건을 대었다.
“갑자기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요?”
“천하의 지안 리가 불쌍해서 이런다면 화낼 건가?”
“화 안 내요. 오늘의 나는 지지리도 운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고맙네요. 내치지 않아 줘서.”
제이슨은 피식거렸다. 입술을 내밀고 있는 그녀가 귀엽게 보였다. 그대로 깨물어 삼키고 싶을 만큼이나 말이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삼켜봤으면 좋겠어.’

장인경

현재 로망띠끄 소설 사이트에서 “안녕하세요”라는 닉네임으로 활동 중.

<출간작>
남편의 옆자리
돼지와 늑대의 거짓말
이프유
고백
당신과의 경계선등.

제이슨은 픽하고 웃었다.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지.”
명백한 비아냥거림이었다. 지안은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켰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그에게 비웃음을 산 게 억울하기도 했다.
“천만에요! 여기엔 내가 먼저 여기에 와있었어요. 당신들이 뒤에 들어온 거고! 그리고 난 그런 변태적인 취미 없어요. 내가 당신인 줄 알아요?”
“뭐라고?”
제이슨은 잘생긴 얼굴을 그녀의 코앞으로 바싹 들이밀었다. 순간, 지안은 흡하고 숨을 삼켰다. 악랄하게 자신을 괴롭혔던 어릴 때의 그가 생각나 지안의 발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의 팔을 가로채어 잡았다.
“왜 이래요? 도발을 시작한 사람은 당신이었는데!”
“숨어서 지켜본 교양 없는 여자는 너였지. 지안 리!”
“당신들 때문이잖아요. 내가 먼저 이 자리에 있었어요!”
“흥분해서 목소리가 너무 커지는 것 좀 봐. 이러니 너희 동양인들은 교양 없단 소릴 듣는 거야.”
지안은 울컥해졌다. 원래부터가 그는 백인 제일인데다 인종차별주의가 뼛속 깊이 차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을 하다니.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럼, 당신 같은 백인들은 교양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들이야말로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형편없는 야만인들이야! 툭하면 얌전히 있는 나라들을 건드리는 주제에!”
“원래 약한 것들이 강자를 시샘하는 법이지.”
지안은 이를 악물며 제이슨을 노려봤다. 있는 힘껏 팔을 비틀어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팔을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꽉 움켜쥐기만 했다.
지안은 너무 아파서 비명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비명을 지를 수 없어 인상만 쓰며 으르렁거렸다.
“이거 놔요!”
“못 놓겠다면?”
“어쩌려고요? 계속 이렇게 붙들고 있을 셈이에요? 제이슨 로우턴!”
지안은 입을 앙다물며 팔을 흔들었지만 그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보다 약하다는 이유로 이렇게 꼼짝도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분했다.
“이거 놓으라니까요!”
제이슨은 팔 한번 잡았다고 파르르 떨며 불한당 취급하는 지안에게 불쾌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슨 오기에서인지 그녀의 팔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홀에서 자신을 봤을 때, 피하지 않고 인사만 해주었더라도 이렇게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악당 취급하며 노려보지 않더라도 아니, 다른 남자에게 보였던 미소만이라도 지어줬으면 이렇게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제이슨은 악악대는 그녀의 연분홍 입술이 얄미웠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입술을 통째로 집어삼켜 아작아작 씹었으면 좋겠군. 그러면 이 귀 따가운 소리도 듣지 않아도 될 텐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어버리자 제이슨은 그녀의 도톰하고 앙증맞은 입술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생각에선 따가운 말만 내뱉는 밉살맞은 입술이다. 그러나 입만 다물어준다면야 더없이 근사한 과육의 맛을 선사해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지안의 팔을 끌어당겨서 자신의 가슴팍에 안기게 했다. 놀란 그녀가 버둥거렸지만 가뿐히 무시해버리고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