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피차 그렇게 취급합시다.”
 
윤시우, 눈 내리는 스노우볼 안에 홀로 선 눈사람 같은 남자.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아무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 것이 그저 당연한 남자.
마음을 내보이는데 한없이 서툴지만 조심스럽게 내보이는 마음은 진짜 진짜인 남자.
 
귀찮다는 데도 못 들은 척, 지치지도 않는다. 초단기 기억 상실증에 드라마틱한 성격과 한없이 넓은 오지랖까지, 안 좋은 건 다 갖추고 있는 여자다. 그런데 조금의 빈틈도 없는 정직한 그녀의 눈이 자꾸만 기대를 갖게 한다. 매서운 그 겨울에 가장 어울리는 일은 따사로운 봄날, 노란 개나리 꽃잎 위에서 하늘거리는 봄볕만큼이나 따뜻한 손을 가진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
 
 
“훠이, 거기 누구 있어요? 나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차효원, 너무 깊숙이 찌르지만 않으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한 여자.
딱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려고 노력하고 퇴근시간만 되면 행방이 묘연해지는 여자.
툭 치면 픽 쓰러져서 죽은 척을 하기에는 뒤끝이 아주 약간, 오백만 퍼센트쯤 있는 여자.
누구에게나 옆을 내주지만 누구와도 거리를 두는 한 그루 나무 같은 여자.
 
빈 마음을 채우려고 집을 짓는 남자라, 비어 있는 깊이를 알 수 없으니 선뜻 다가갈 수도 없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빠져나오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한결같이 진지한 그의 눈을 쉽게 외면할 수도 없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그런데 빈 들판에 선 눈사람 같은 그에게는 자꾸만 기대를 하게 된다. 매서운 그 겨울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일은 차가운 눈사람을 품에 안는 것.
 
 
 “……사람이란 진심으로 인간의 마음을 다독일 줄 아는 사람에게 넘어가게 돼있다니까.”

지윤서  ::  사자자리, AB형, 커피 홀릭
 
따뜻하고 위트 있고,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꿈이 있음
youaretoxic@gmail.com 
 
[출간작]
 
① 내겐 너무 악랄한 그녀 (전자책)
② 그 여름에 생긴 일 (전자책)
③ 스콜, 마음으로 내리는 비 (전자책)
④ 눈사람을 녹이는 방법

회의도 끝났는데 굳이 불러 세워서 친한 척이라니. 주섬주섬 서류를 챙기던 시우는 시선을 들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사무실 구경 시켜드릴까요? 토요일에는 제대로 못 보셨으니까…….”
“바보는 아니겠죠.”
문장 끝이 올라가지 않은 것을 봐서는 분명 질문은 아니다.
“분명히 얘기한 거 같은데. 귀찮은 건 질색이라고.”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염두에 두는 배려 충만한 화법 같은 건 배운 바도 없고 딱히 배우고 싶은 생각도 없는 그의 말투가 꽤나 딱딱했다.
“하하, 귀찮게 하는 게 아니라…….”
“피차 투명인간 취급.”
찰나의 순간, 효원의 눈과 검은 뿔테 안경 너머 무표정한 시우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진심이구나, 투명인간 취급하라는 그의 말은. 그런데 어째서 이 남자는 안 보이는 사람으로 취급되고 싶은 것인가.
“에이, 이렇게 잘 보이는데 어떻게 투명인간 취급을 해요?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하셨잖아요. 눈에 확 띄시거든요. 호호.”
후, 거짓말도 하면 할수록 느는 건가. 재웅이야 반박의 여지가 없는 훤칠한 외모가 맞지만 이 남자는 취향에 따라서는 머리를 가로저을 사람도 꽤 있을 법했다. 무표정과 무심함, 퉁명스러움이 절묘하게 뒤섞인 상당히 까다로운 인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혹시 나한테 관심 있습니까?”
“네? 그, 그럴 리가요.”
흠칫, 효원이 저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남자 뭐야, 까칠한 것도 모자라 도끼병까지 있는 거야? 무조건 다 나를 찍었다는? 어이가 없는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잘 됐군요. 나도 그쪽한테 관심 없고 그쪽도 나한테 관심 없고. 끝.”
부대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간을 회사에 끌어들인 게 분명하다. 공적인 친절과 사적인 관심을 이음동의어로 생각하다니, 우리나라의 국어 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 국어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인성 교육의 부재가 문제인가. 하긴 근거도 없는 도끼병을 양산하는 건 학교 교육의 문제는 아니다. 이 남자의 태생적 오류인 거다. 자료와 머그를 챙겨 든 남자가 느긋한 걸음으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놀라서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그녀를 홀로 남겨둔 채.